[시론/조경란]‘슬픈 고백’의 행진

  • 입력 2007년 8월 2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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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인 것 같다. 거짓말이 아무리 인간의 제2의 천성이라고는 해도 요즘 자고 나면 하나 둘씩 밝혀지는 유명 인사들의 ‘허위 학력’ 사건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에 따르면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로 말하는, 진실이 아닌 진술이다.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가 부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인간(person)의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는 게 요즘처럼 적절하게 느껴진 때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키운 ‘학력 거짓말’

학력이나 별다른 배경 없이 이름만으로도 스스로 빛날 그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바람으로 ‘용서와 처분을 바라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씁쓸하다. 그들 중 대다수가 문화예술계 인사라는 점, 한때 친분을 나눈 사람도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더 착잡하게 느껴진다. 일도 손에 안 잡혀 커피나 한 잔 마실까 하고 보니 커피콩이 꼭 눈물방울처럼 생겼다. 학력을 속일 뻔한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스무 살 때, 나를 가르치던 컴퓨터 그래픽 강사가 자신이 이사로 있는 디자인 회사에 취직이란 걸 시켜 주었다. 내가 일하게 될 메인 컴퓨터실에는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일곱 명의 팀원이 있었다.

어느 날 여성 팀원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자긴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라고 물었다. 또 어느 날은 다른 이사가 혹시 외부에서 클라이언트가 와서 물어보면 디자인 계통 학과를 다니다가 휴학 중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고 은밀히 권유하기도 했다.

한 7개월쯤 다니다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소설가 등단과 동시에 대학을 졸업한 때가 스물여덟 살이었다. 나를 아끼던 한 선생이 언젠가 학위가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 공부를 더 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해 주었다. 흔들린 적이 없진 않았지만, 방에 틀어박혀 소설만 썼다. 내가 진정 원하는 건 선생이나 석박사가 아니라 좋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였으니까.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학벌이 가장 큰 장애가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분야에선 다른 누구보다 열정이 있고 능력이나 경험도 갖췄다면 말이다. 10년, 30년이 넘도록 거짓이라는 ‘고통의 옷’을 입은 채 전전긍긍하며 허위(虛僞)의 삶을 살아왔을 그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남의 일만 같진 않다.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은폐하고 미화한 이유에는 불가피한 이해관계와 사회적인 어떤 척도나 강요 같은 게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거짓말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비난받아 마땅하고 처벌이 따라야 하겠지만 허위 학력 역시 사회적인, 암묵적인 동기와 요구가 없으면 불가능한 거짓말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학력이 밝혀진 유명 인사들이 그 문제만 제외한다면 지금 그 자리를 지키기에 부족한 점은 무엇일까.

고백 받아들이는 용기도 필요

거짓말의 첫 번째 구성 요건은 적어도 두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과 사회, 혹은 나와 당신. 진실은 불편하고 냉정하며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해도 만약 우리가 진실과 진술, 이 두 가지 길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마 진실 쪽일 것이다. 진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진실이 아닌 것을 찾아낼 수는 있으며 진실이 아닌 것이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하나의 커다란 무늬로 보면 그건 거짓과 진실, 고통과 행복 같은 정교한 무늬로 채워져 있지 않을까. 지금은 모두에게 용기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고백을 하는 용기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만약 모든 사람이 언제나 진실만을 말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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