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역사소설 열풍이다. 소설가 한승원(68·사진) 씨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삶을 담은 장편 ‘추사’를 냈다. 남해 바닷가의 토착어를 구사한 작품들로 잘 알려진 한 씨가 추사를 소설화한 것은 의외인 듯 보인다. 그렇지만 책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작가가 왜 추사에게 몰입했는지 헤아리게 된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시기는 말년의 추사가 유배지에서 보낸 시간이다. 전남 장흥군의 율산마을에 해산토굴을 지어놓고 차와 연꽃에 심취해 창작의 시간을 보내는 작가는, 고독과 욕망과 싸우면서 시간을 보낸 추사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천재로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는 해석이 있지만,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신필 뒤에 가려진 또 다른 김정희의 얼굴’이다.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흘러가게 하려다가 다치는 과정과, 유배지에서 아파하고 슬퍼하면서도 치열하게 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소설 속 추사는 삼절(三絶)을 이룬 천재 예술가이자 북학파의 선구자이면서도, 양자와 서얼 자식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아비의 얼굴을 드러낸다.
제주도에서 유배 중인 추사를 찾은 아들 상우는 자신이 서얼 신분이라는 데 절망을 토로한다. 추사가 “천재라는 건 없다”는 얘기로 아들을 달래는 모습은, 논리적이면서도 자애롭다. “명필로서의 완성이 백 칸이라 한다면 아흔아홉 칸까지는 그 사람의 부단한 분투로 이룰 수 있지만, 단 한 칸은 신성이 작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신성을 어느 날 문득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 신성은 그 사람의 가슴에 원래부터 있던 것인데, 그 사람에 의해 하늘과 감응하여 발견하고 얻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추사가 품었던 욕망을 버려가는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그 과정 사이사이에 추사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과 정치, 수구 세력에 의해 그 꿈이 좌절되는 장면이 그려진다.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면서 추사는 마음을 비워낸다.
작가는 부처를 받아들이고 ‘유마거사’가 돼 버린 추사가 명필 현판을 쓰고 죽는 장면으로 소설을 맺는다.
“한번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자기 패거리의 권력과 이권을 위하여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해 버리는 일은 이 시대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하는 한 씨. 시대와 불화하면서 추사가 감당한 고뇌와 절망과 분투는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말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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