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사명대사 아시나요?

  • 입력 2007년 9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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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1544∼1610·영정 사진)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호국 불교’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왔다. 하지만 사명대사의 참모습은 전쟁이 끝난 뒤 당시 일본 집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회담을 통해 포로 송환 등 전후처리를 마무리 짓고 평화외교의 틀을 구축한 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적지 않다.

사명당기념사업회(회장 오재희 전 주일대사)가 8일 일본 오사카(大阪) 민단본부 대회의장에서 개최한 국제심포지엄 ‘사명대사의 도일(渡日)과 전후처리 평화외교’(동북아역사재단 등 후원)는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사명대사의 업적과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사명대사의 평화외교 정신이 역사문제에서 마찰을 빚고 있는 두 나라의 화해를 앞당기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사명대사는 결사항쟁의 결의에 투철한 의승장과 전후 강화협상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 외교관의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며 “그의 주도면밀한 언행과 협상에 힘입어 조선 왕조와 도쿠가와 막부가 국교 회복에 합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중세 한일 문화교류의 꽃을 피운 조선통신사도 당시 선조의 특사로 일본을 찾은 사명대사의 협상력 덕택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송운(松雲)대사로 알려진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에도 당시 일본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협상을 하고 왜군의 철수 조건 등을 협의했다. 조영록 동국대 명예교수는 “이 과정에서 일본 수뇌부의 한반도 분할 구상을 간파하고 왜군 내부의 이간책을 시도해 협상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오사카 부(府)와 오사카 시,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가 후원하는 등 일본 사회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 사명대사가 재조명되는 것은 전쟁으로 헝클어진 양국 관계를 정상화한 사명대사의 정신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사명당기념사업회 측의 설명이다.

오 회장은 “일본인들이 20세기에 한국을 강점한 역사는 비교적 잘 알지만 400여 년 전 조선을 침략한 데 대해서는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며 “사명대사 관련 사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대해 역사 교육을 시키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사명당기념사업회는 1997년 발족된 이후 한국과 일본에 있는 사명대사의 유적지 및 자료 발굴과 서적 발간, 학술회의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사카=박원재 기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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