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가 한창이던 지난달 중순.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 교수가 웃으며 한 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내가 해야 할 말을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내 입을 빌려 말하려 하지 마세요’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는 한국 내에서 ‘미국 책임론’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여권의 간판급 의원들이 “미국도 자국민이 납치됐을 때는 인질범과 협상을 했다”며 미국의 이중잣대를 비판하는 성명을 쏟아 내고 있었다.
사실일까. 기자도 솔깃했다. 21명의 목숨이 달린 문제 아닌가. 하지만 자료를 아무리 뒤져도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납치·테러 문제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교수, 싱크탱크 연구원 30명에게 인터뷰 요청서를 보냈다. 휴가철이어서 그중 6명(미국 4명, 독일 1명, 카타르 1명)만 응했다.
먼저 ‘최근 10년간 미국이 납치범과 협상을 벌여 요구를 받아 준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속 시원히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중잣대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인질 사건들의 해결 경위에 대해 구체적 사실들을 전해 주면서도 결론은 “진실은 나도 모른다”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향이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였다.
듣다 보면 한쪽으로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 같아 “결국 납치범과 흥정을 했다는 뜻이냐” 혹은 “이중잣대론은 근거가 없다는 뜻이냐”고 되묻곤 했다. 그러다 “Don't put words into my mouth”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었다.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고 싶은 집착이 빚은 결례였다.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아프간 정부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를 물었다.
“미국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는 이라크보다 더 독립적이다.”(독일 본의 국제전환센터 허버트 울프 전 소장)
“미국은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아프간 정부가 미국의 요구대로 다 할 것이란 뜻은 아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 기울일 것이다.”(브루킹스연구소 하디 아미르 연구원)
생각해 보면 평생을 연구한 전문가들조차 명확하게 결론짓기를 주저하는, 미세하고 다층적인 결을 지닌 주제들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명한 도장을 찍어 왔던 걸까.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팩트 중에서 누군가 구미에 맞는 것들만 골라 점 잇기를 해서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 내면 정치인들은 거기에 확성기를 들이댄다. 그게 다시 언론에 보도되고 웹사이트들을 옮겨 다니면서 진실처럼 굳어져 버리는 ‘위험한 확신’의 재생산 구조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미국의 관리나 학자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느끼는 애로사항은 복문의 다층적 대답이 많다는 점이다. 자신이 구상하는 목적지가 분명히 있으면서도 거기까지 다다르기 위한 전제조건들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이다.
7일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대해 언급하면서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계속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에 닿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은 그 다음 얘기를 오히려 듣고 싶어 한다”며 거듭 ‘더 명확히’를 요구했다. 묘한 웃음을 지으며 “어떻게 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꾸할 때 부시 대통령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을까.
‘Please, don't put words into my mouth.’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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