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창 시절엔 처용이 무당일 가능성이 있다고 배웠지만 우리 딸은 아랍인이라고 배우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용은 880년경 헌강왕 때 동해 바닷가 개운포(울산항)에 홀연히 나타났다. 외지인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코란 즐겨 들은 세종대왕
아랍인의 저술에도 우리나라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슬람 학자인 마수디는 947년 한반도에 대해 ‘신선한 공기, 맑은 물, 비옥한 농토를 가졌다’고 썼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 박해를 피해 달아난 알라위족이 한반도에 망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엔 몽골을 매개로 이슬람인과의 교류가 더욱 빈번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이들은 고려 개성에 예궁(禮宮)을 짓고 살았다. 예궁은 지금의 모스크다.
이슬람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예조가 아뢰길 회회(回回)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이질감을 느끼는바 이미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의관을 따라 차이를 없애야만 자연스럽게 혼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돼 있다. 세종은 이 말을 타당하게 여겨 ‘그리하라’고 윤허했지만 코란 강독만은 아주 즐겨 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슬람에 대한 기억 하나가 있다. 살던 동네에 모스크가 있어서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함께 중동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모스크였다. 호기심에 살짝 들어가 보았던 모스크 내부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발을 씻기 위한 수도꼭지만이 생각난다.
모스크에선 새벽 예배를 알리는 독경 소리를 확성기로 내보냈다. 달콤한 아침잠을 깨우는 괴상한 소리가 너무 싫어 베개로 귀를 막으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곤 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어떤 종교도 잠을 깨울 권리는 없다고 씩씩거렸다.
그것이 이슬람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다. 그리고 지금껏 이런 인식에서 별로 나아가질 못했다. 이슬람은 배타적이고, 여성을 차별하며, 반문명적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 당연했다. 이슬람에 대한 인식은 서유럽 사회,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이 짙은 미국이라는 안경을 통해 한 번 걸러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이슬람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슬람은 사막 한가운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주변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며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로 개종시켰다는 것은 서구에서 만들어 낸 개념”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반문명 이슬람’은 서구인 편견
탈레반 인질 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게도 이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탈레반은 알라의 가르침을 이단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인질 사건을 겪으며 탈레반을 이슬람 전체로 인식하는 태도가 더욱 심해진 것 같다. 그래선 안 된다.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될 모처럼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이슬람 인구는 14억 명으로 기독교 인구 다음으로 많다. 우리나라 에너지의 90%가 중동에서 공급된다. 중동에서도 우리 드라마 ‘대장금’에 열광하고 우리 휴대전화가 불티나게 팔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그들은 여전히 멀고 낯선 존재다.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곧 글로벌 스탠더드는 아니다. 미국조차도 이슬람을 이해하지 못해 정책 실패 등 곤경을 겪고 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화사회에서는 다른 문명, 다른 종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곧 경쟁력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