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문명]파트너 빈곤

  • 입력 2007년 9월 21일 03시 02분


인간관계를 ‘모 아니면 도’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죽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푹 빠졌다가 상대가 자기만큼 집중하지 못한다고 느낄 땐 무 자르듯 끊어 버린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점점 외톨이가 된다. 건국대 의대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현실에 없는 이상적 관계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면서 “구름을 향한 인간관계 기대치를 땅으로 내리라”고 조언한다. ‘관계에 대한 현실적 기대치’를 가져야 실망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인간관계를 ‘관념’에 묶어 두는 사람들이 있다. 스토커란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남자주인공 상우는 여주인공 은수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사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한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의 허탈함, 영원할 수 없는 사랑과 관계의 속성을 깨달으며 봄날(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인류는 신(新)유목민이라 불린다. 삶에서 이동성의 비중이 커지는 만큼 인간관계의 변화 폭도 크다. 의지만 있으면 직장도 옮기고 배우자도 바꾼다. 영원한 관계는 없다. 붙박이 시대의 인간관계는 지속성이 최대 가치였는지 몰라도 가파른 변화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고민하는 신유목민에게는 인간관계도 경영의 대상이다. 제한된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무조건 마당발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국제관계도 같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한국 외교는 미국 중국 일본을 똑같은 거리(등거리)로 대하다 정작 친구(파트너)를 잃어 버렸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친구가 많아 보이지만 믿을 만한 친구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면서 이런 상태를 ‘파트너 빈곤’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외교무대에서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등거리 외교’란 현실에 없는 관념과 가공의 세계 아닐까.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다는 식의 중립은 강대국의 미덕이지 우리처럼 ‘낀 나라’엔 어울리지 않는다. 토플러의 진단을 새겨 외교의 상상력도 구름 위에서 땅으로 끌어내릴 일이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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