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찬국]그린스펀의 경고는 ‘현재진행형’

  • 입력 2007년 9월 21일 03시 02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20년 가까이 재직하면서 한때 ‘경제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렸던 앨런 그린스펀의 자서전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 필자가 1996년 FRB의 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할 때 그린스펀과 이사들에게 영국 경제 동향에 대해 직접 브리핑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의장이 영국에 대해 매우 잘 알고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준비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외환보유액 기댈 언덕 안돼

그린스펀의 자서전이 출간된 뒤 미국 신문의 서평과 기사를 보면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엇갈린다. 통화정책 총수로서 훌륭했다는 평가와 그의 재정정책에 관한 견해에는 부정적 평가가 나왔다. 평생 작은 정부 옹호자임을 웅변했음에도 조지 W 부시 대통령 취임 초기 재정 적자 확대가 불을 보듯 뻔한 대규모 감세안을 지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 사정을 회고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1997년 말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200억 달러를 웃돌았다는 공식 통계와는 달리 은행들의 단기외채 상환 등에 쓰이며 바닥이 보이는 상태였다는 내용이다. 우리 정부가 보유액 고갈을 막으려고 일본 정부를 통해 일본 은행들의 한국 대출을 차환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런 사실이 일본 중앙은행을 통해 그에게 알려졌으며 11월 말 FRB 간부가 한국은행과 직접 통화해 보유액 고갈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그 후 쉽게 놀라지 않는 고수의 이미지에 걸맞게 공식 석상에서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며 차분한 어조로 외환보유액 및 외채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성공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공식 통계를 믿었다가 그린스펀 자신도 사태 진전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솔직한 토로는 신선하다.

우리는 정책 투명성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러 분야에서 세계 10대 경제 규모에 걸맞은 몫 챙기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람들 간의 교분과 마찬가지로 국가 간에도 동등하고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려면 가능한 한 솔직한 것이 최선이다.

그린스펀이 언급했듯 이제는 우리의 외환보유액이 엄청나게 늘었고 대외 채무 구조나 투명성이 크게 개선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자서전에도 아시아 네 마리 용(龍)의 성장률 저하를 언급했는데 문제는 한국이 다른 3개국에 비해 성장 저하가 더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보유액이 쌓인다는 것은 결국 우리 경제가 대외 거래에서 잉여를 내는 것에만 성공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등 앞으로 지속적으로 늘어날 자원에 대한 수요 증가를 생각하면 국내 경제의 확장을 통한 공급 능력 확대가 필수적이다. 대외 잉여는 변화무쌍한 국외 사정에 좌우되기 때문에 믿고 기댈 언덕이 되지 못한다.

시장경제 역동성 되살려야

끝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2030년경 미국 경제에 대해 우려 섞인 전망이 주는 시사점이 크다. 세계경제 여건 변화에 따라 지난 20년간의 물가 안정세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고, 통화 당국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화에 따라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간의 소득 격차가 지속되며 고소득자를 중과세하자는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따라서 기술개발, 새 노동력의 질적 향상, 그리고 어떻게 사회 전체적으로 중지를 모아 포퓰리즘을 극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보존할 것인가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린스펀은 미국의 앞날에 대해 낙관적이다. 우리도 그러한지 걱정스럽게 자문해 본다.

허찬국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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