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개살구 솎아내기’

  • 입력 2007년 10월 22일 2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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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첫해 “한국의 정치 경제 모든 것이 선거 한번 치르고 대통령 한 명 바뀐 것으로 흔들릴 만큼 허약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은 대통령 한 사람이 국운과 민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질리도록 체험했을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은 “그놈의…”라고 헌법을 구박하면서도, 자신의 헌법상 임기는 물론이고 차기 정부의 운신까지 제약하려 한다. 국민은 지켜볼 도리밖에 없는 처지다. 후보 시절의 공약, 언설, 연기(演技)에 넘어갔다고 자책해 봐야 속절없는 일이다.

지금의 대선 후보들도 달디단 약속을 국민 앞에 펼치고 있다. 공약에 살짝 거품이 낀 정도라면 일일이 문제 삼기도 어렵다. 거품을 걷어 내는 노력은 유권자들이 해야 할 몫이다. 선거권은 공짜 권리가 아니다. 충동구매의 책임을 당선자가 져 줄 리 없다.

12월 19일의 선택에 도움이 될 참고자료가 없지는 않다. 살아있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인 ‘노무현 모델’이 그 하나다. 세계의 주류(主流) 지도자들과 공인받는 석학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적지 않다.

취임 반년 되던 날 스스로 밝혔듯이, 노 대통령도 경제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다. 특히 서민과 약자의 삶에 볕이 들도록 하겠다는 포부는 훌륭했다. 그러나 현 정부 5년 동안 가장, 그리고 갈수록 심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를 자신의 존재 이유인 양 강조했지만, 빈부격차는 현 정부 아래서 전례 없이 커졌다.

빛 좋은 공약, 5년 전에도 넘쳤다

집 부자 2%를 때려 98%를 위하겠다고 했지만 집값 차가 더 벌어졌고, 집 없는 약자의 ‘내 집 마련’ 꿈은 더 아득해졌다. 지역균형발전을 노래 부르듯 했지만 최대 수혜집단은 땅 부자와 투기꾼이고, 소지역 간 불균형이 불거졌으며, 땅값 폭등 탓에 기업들의 국내 투자가 더 힘들어졌다.

여기서 노 정부의 실패와 그로 인한 국가적 후퇴, 국민적 고통의 원인을 다 짚을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점은 목표와 선전만 거창했지, 이를 현실로 만들 능력은 미달이었다는 사실이다. 임기 첫해에 청와대는 “로드맵과 매뉴얼로 작성된 개혁 프로그램이 250개나 된다”고 자랑했지만 어떤 로드맵이 경제와 민생의 회복을 도왔는지 국민은 알지 못한다.

대통령 최측근 참모가 노 정부를 “구름 속에 싸인 달”이라고 미화하며 “언젠가 구름이 걷히면 그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 하고, “아마추어가 더 아름답다”고도 했지만 역시 실없는 소리였다.

능력보다도 큰 문제는 코드였다. 걸핏하면 국민을 20 대 80으로 편 가르고, 국가가 시장(市場)을 다스려야 한다고 맹신하며, 우려와 비판을 악(惡)으로 몰기 위해 온갖 궤변을 동원하고, 민심과 세계의 대세에 역류하는 것을 정의(正義)인 양 내세운 ‘비뚤어진 좌파 운동권 의식(意識)과 행태’가 무능 이전의 고질병이었다.

대선 공약대로 ‘기업하기 좋고, 투자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시장원리를 존중하고 북돋웠더라면 ‘연 7% 성장, 일자리 50만 개씩 창출’ 공약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과는 달리 대기업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고, 경영권 불안을 부채질했으며, 출자제한 등 갖가지 규제를 고집했다.

나라와 국민의 먼 장래까지 정말로 걱정하는 정부라면 세금부담 증가를 전제로 한 십수 년 뒤의 복지정책을 섣부르게 내놓을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계화시대, 지식정보가 생명인 시대에 부응할 인적 경쟁력 배양에 ‘정권의 명운’이라도 걸었어야 했다. 평등 지향의 사회정서에 편승해 세계와 경쟁할 수 없는 평둔화(平鈍化)교육을 고집하고, 학교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 교육의 약자들부터 설 땅을 잃게 할 일이 아니었다.

57일 뒤 유권자 선택에 걸린 國運

앞서 가는 나라의 지도자들은 경제와 교육의 창의, 경쟁, 효율을 북돋울 시스템을 거부하고는 국가도 개인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부자 나라, 경쟁력 강한 나라를 위한 정책에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더 일하자고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를 찾은 세계의 석학들만 해도 거의 예외 없이 노 정부의 이상한 코드를 안타까워하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새 대통령을 선택할 날이 어느덧 57일 앞으로 다가왔다. 3700만 유권자들은 빛 좋은 개살구를 솎아 낼 것인가.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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