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청소년 심리]‘우행시’소녀 유정의 경계선 인격장애

  • 입력 2007년 10월 26일 03시 03분


성폭행당한 유정, 엄마의 꾸중에 분노하다

청소년들은 부모에게서 “이해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처절한 심정일 때 부모에게서 모멸감이나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들으면 자살 시도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는 이런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중학생인 유정은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유정은 울면서 이 사실을 털어놓지만 엄마는 “뚝 그쳐. 다 큰 계집애가 어떻게 처신했기에. 창피한 줄 알란 말이야”라며 따귀를 때린다. 이후 유정은 엄마를 증오하며 분노와 자기혐오감 때문에 자살 시도를 반복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살아간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이런 증상을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한다. 유정에게는 하루가 시작된다는 게 끔찍한 고통이다.

사형수 윤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아 동생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은 아픈 상처가 있다. 어린 동생과 힘겹게 밤길을 걸어 엄마를 찾아가지만 엄마는 문도 열어 주지 않았다. “널 괴롭히는 게 뭐니”라는 수녀님의 물음에 “아침이요”라고 대답하는 윤수.

수녀인 고모를 따라 교도소에서 사형수 윤수를 만난 유정은 비밀을 죽음까지 가져가겠다는 윤수에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를 힘겹게 털어놓는다. 이때 윤수는 “미안합니다. 저 같은 놈 때문에. 제가 더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윤수가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은 유정이 엄마에게 더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성폭행을 당한 15세에 묶여 있던 서른 살 유정은 비로소 자신에게 고통을 주던 외상적 기억을 떨치고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난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가진 청소년은 유정과 같이 행동한다. 감정 표현이 강렬하고, 대인관계가 불안정하며, 자포자기한 듯한 행동을 하고, 공허하고 허무적인 성향이 있다. 또 가정환경이 혼란스럽고 부모가 정서적, 언어적으로 학대하거나 자식을 유기하고 방임한 경우가 많다. 가족 또는 친척에게 성적학대를 당한 경우도 적지 않다.

경계선 성격장애 청소년들은 내면에 뿌리 깊은 자기혐오감이 있고 충동적으로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한다. 자신이 가치 있고 사랑받을 만하다고 느끼지 못하며 자기혐오감으로 인한 정서적 고통을 회피하고자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청소년들은 누군가, 특히 부모가 자신을 충분히 수용한다는 것을 경험할 때 기적처럼 변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때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기쁨, 즐거움 같은 긍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미움, 슬픔, 두려움, 분노 등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아이가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을 가질 때 부모는 이를 따뜻하게 품어 주어야 한다. 정서적 고통으로 흔들리는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말은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이다.

신민섭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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