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다음 사람이 일어나 말했다.
“제 소개를 하면서 11번째 직장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저보다 회사를 더 많이 다닌 친구가 있군요.”
모두 배꼽을 잡았다. 최근 동창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10여 년 만에 만난 사람도 있어 한사람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중이었다.
열두 번째 회사를 다닌다는 그 친구의 첫 직장은 대기업이었다. 벤처 붐을 타고 벤처회사로 옮겼다가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는 와중에 다른 회사로 옮겼고, 그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가 접었다.
20년 가까이 한 회사만 다닌 사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기업체를 다니다 교수가 되거나 심지어 한의사로 완전히 직종을 바꾸는 등 두세 번 직장이나 직업을 바꾼 사람이 많았다. 외환위기가 있던 1997년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직장은 제2의 가정이었다. 회사 동료의 결혼식은 물론이고 아기를 낳으면 돌잔치까지 가는 게 보통이었다. 동료의 가족들하고도 친했고 명절에는 함께 모여 윗사람 집에 인사를 갔다.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일도 많았다. 단일호봉제로 일은 더 많이 하고 봉급은 더 적게 받았다. 실력도 리더십도 없는 상사가 횡포를 부려도 참아야 했고, 게으른 부하는 어떡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평생직장이 없어지고 더 나은 연봉과 미래를 찾아서 회사를 옮기는 일이 많아지면서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변했다. 과거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이 된 대신 끈끈한 정(情)도 줄었다.
요즘 조직에서 강조되는 것이 R&R(Role and Responsibility)이다. 각자 수행할 역할과 그에 따른 책임 관계를 확실히 정립한다는 얘기다. IT업계의 한 팀장은 “예전보다 사(私)적인 관계가 줄고 이해관계가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만남도 적어졌나? 아닌 것 같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모임은 이어진다. 회사를 옮겨도 친한 사람은 계속 만나고, 회사를 오래 다녀도 싫은 사람은 계속 싫은 법이다.
전통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무얼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파워’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 정보가 많은 사람, 그래서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계속 만나게 된다. 이뿐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뜻이 통하는 사람, 배울 게 많은 사람,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 이런 사람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친구’가 된다.
반대로 말끝마다 시비조인 사람, 혼자 다 말하는 사람,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 주관 없이 윗사람 말만 따라하는 사람, 공연히 주변사람을 괴롭히는 사람, 아무 콘텐츠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
최근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직장인 2400여 명을 설문 조사했더니 97.5%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이 월급이나 성과 스트레스가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 후배와의 마찰’(41.2%)이었다고 한다.
‘나는 어떤 동료인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신연수 특집팀 차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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