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信義는 어디 가고…

  • 입력 2007년 11월 8일 03시 02분


지난달 여성지를 뒤적이다 며칠 전 이혼한 30대 탤런트 부부의 가족사진을 보았다. 사이좋게 찍은 가을여행 화보에 성난 얼굴로 서로를 비난하는 최근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이들은 집 안에서 전쟁을 벌이던 그 시간에 밖에서는 행복을 팔고 있었던 셈이다.

신정아 씨가 자서전을 내는 문제를 변호사와 상의했다는 풍문이다. 뭘 폭로한다 해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울 것 같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더하다. 아들이 엄연히 한국에 있는데도 “미국에 있어서 그립다”며 부정(父情)을 내세워 병역기피 시비를 피해 간 사람이 연임까지 한 ‘공영방송’ 사장이다.

잇따라 터져 나오는 비리의혹 사건의 장본인들이 “나는 결백하다” “공무원 생활 그렇게 안 했다” “명예를 훼손한 언론을 고소하겠다”며 거꾸로 언론의 명예를 짓밟았다. 이들의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언론을 향해 “깜도 안 되는 소설”이라며 언론 욕보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청와대 수하들에 이어 현직 국세청장까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에도 국민 앞에 사과 한마디 없다.

스캔들은 하나같이 ‘가까운 사람’의 폭로를 계기로 터졌다. 국세청장의 뇌물 수수는 부하가, 대학 총장 부인의 편입학 비리는 이웃사촌이 발설했다. 재벌개혁을 하겠다며 대기업 비리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사람은 그 기업에서 7년간 100억 원 이상의 보수를 받은 전직 법무팀장이다.

내부자 고발은 사회를 투명하게 만드는 데 효과가 있다. 그러나 사감(私感)이 개입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익이 목적이 아니라 사익을 위한 고백에 양심선언이라는 훈장을 선뜻 달아 줄 수는 없다.

불량한 고백을 막으려면 그런 것이 판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내부에서 정화되어야 건강한 조직이다. 그것이 외부로 터져 나왔다는 것 자체는 조직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어떻든 이 시대는 드러난 것만 가지고는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러니 문제 해결에 쓸데없이 많은 에너지가 낭비된다. 더구나 정의, 정직, 양심을 내세우지만 실은 다른 계산이 있으니 그 일과 아무 상관없던 사람들까지도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집단 배신감을 갖게 된다.

‘법과 원칙의 화신’을 자처하던 정치 지도자가 다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말했지만 자신을 두 번이나 대선 후보로 만들어 준 당을 배반한 것부터가 ‘인(仁)’과는 거리가 멀다. 느닷없는 독자 출마로 야당 대선 후보의 등을 친 그는 야당 후보가 “믿었다”는 당내 원로였다. 그의 3수(修) 감행은 올해 대선 최대의 ‘정치 추행(醜行)’이 될 수도 있다.

도덕(道德)에는 법이라는 공식적 규범 이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의(信義)라는 비공식적 규범도 있다고 공자(孔子)는 가르쳤다. 신의는 법과 함께 사회 운영의 기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법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물론이고, 신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있다.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아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도덕이라고 가르치겠는가. ‘전군표스럽다’ ‘이회창스럽다’ 같은 신조어가 생긴들, 그것은 누구에게도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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