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공포에 질린 유럽인들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세등등하던 몽골군이 급히 철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 오고타이가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각자 칸(汗) 계승 후보자였던 기병 지휘관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군대를 몰아 몽골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서쪽 끄트머리 땅’쯤이야 나중에 돌아와 상대해도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뒤 몽골군은 다시 중부유럽을 넘보지 못했다. 역사상 최고 비율의 전투력 독점을 자랑하던 대제국은 분열을 거듭하다 두 세기를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어디서나 약세(弱勢)가 강세를 이기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강자의 오만이 내부의 틈새를 키워 스스로 분열하는 데서 약자에게 기회가 열린다.
세의 강함이 불러오는 오만이 단지 양(量)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문제에 그치는 것 같지는 않다. 21세기의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는 최근 비상등이 켜졌다. 경제 불안만이 문제는 아니다. 세계 지도국으로서의 위상이 추락하는 현실은 미국에 더 큰 위협 요인이다.
미국 지도자급 전문가 20명으로 구성된 ‘스마트파워 위원회’는 최근 미국의 위상 회복을 위한 국가전략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군사력 위주의 ‘하드파워’로 강압적인 힘을 드러내기보다 문화와 가치 등 ‘소프트파워’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냉전 이후의 ‘강세’에 도취한 결과 동맹들과의 끈끈한 유대를 상실했으며 테러리스트들이 그 틈새에 기생해 강자들의 틈을 벌려 놓고 있다는 위기감이 두드러진다.
기자가 2002년 뮌헨에서 만난 독일 작가 겸 사회평론가 엔첸스베르거는 “예상보다 일찍, 기대보다 많은 것을 성취한 자는 성취의 독(毒)에 빠진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딴난 독일이었지만 그 뒤 기대하지 못했던 라인 강의 기적을, 이어 또 하나의 기적인 통일까지 성취했다. 그 후 나타난 심각한 경기 후퇴와 사회적 이완은 독일이 이룩한 ‘강세’의 역작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을 구가한 이력도, 외환위기의 덫에 걸린 역사도 기자보다 오히려 소상히 꿰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한국이 여러 면에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만보다는 후회하지 않을 교훈을 많이 얻기 바랍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강자의 오만이 만회하기 어려운 결과를 부른 사례는 많다.
1969년 독일 총리로 취임한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당수는 당 내에 환경주의자들이 활동할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 헬무트 슈미트에게 환경보호란 성가신 소리였다.
환경주의자들은 1980년 결국 녹색당을 창당해 나갔다. 사민당의 당세가 타격을 입었음은 물론 환경과 관련한 ‘부드러운 정책 집행’의 기회도 사사건건 놓쳐야 했다.
‘포용’이라는 덕목이 요란한 세의 과시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은 동과 서가 서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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