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불평을 하고 있는데 우리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너는 얼굴 가죽이 얇아서 그렇다. 그래서 열심히 마사지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의학적으로 정말 사람에 따라 피부가 두껍고 얇을 수 있는지. 무슨 근거인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내 얼굴 피부가 얇아서 여드름도 나고 트러블이 잘 생긴다고 하셨다.
표정 하나 안 변한 채 말바꾸기
재미있는 건 우리말이나 영어 똑같이 피부가 얇거나 두꺼운 것을 비유적 표현으로 쓴다는 점이다. “thin-skinned(낯가죽이 얇은)”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잘 타거나 소심한 성품을 묘사하고, “thick-skinned(낯가죽이 두꺼운)”는 좀 뻔뻔하고 남의 말에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양쪽 다 장단점은 있다. 일반론이지만 ‘thin-skinned’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고 양심 바르지만 결단력이 없고 남의 비난에 민감하다. ‘thick-skinned’ 사람들은 제멋대로이고 안면 몰수하고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고 나서도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반면에 카리스마가 있고 강한 의지력도 있어 보인다.
우리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실제로 “피부가 얇은” 나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단연코 thin-skinned 사람들의 부류에 속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내가 생각해도 뻔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소심하고 남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하고 대중 앞에 서거나 무슨 일이든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거나 남의 비난을 받으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이렇다 보니 늘 걱정투성이이고 하루하루 사는 게 피곤하고 고달플 때가 많다.
그런데 얼마 전 이인제 씨나 이회창 씨가 한동안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다가 이번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TV에 나왔을 때 난 정말 깜짝 놀랐다. 잊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생뚱맞게 등장해서가 아니다. 내가 놀란 이유는 몇 년 만에 보았는데 그들이 전혀 주름살 하나 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삼 생각해 보니 비단 그 두 사람뿐만 아니라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자연적인 노화 현상과 별로 관계없는 듯 보인다. 이명박 씨나 정동영 씨를 보아도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마가 반질반질하고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다. 정치인들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어 피부 관리를 잘 받아서인지 아니면 고급 음식만 먹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두꺼운 피부’와도 상관이 있지 않나 싶다. 전혀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인간적 상식을 무시하거나 아무런 수치심 없이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는 등, ‘두꺼운 피부’의 특성을 갖고 있고 피부가 두꺼우니 자연히 주름도 잘 안 잡히고 노화도 느린 게 아닐까.
며칠 전 저녁 퇴근하다 거리의 thick-skinned를 만났다. 오토바이 하나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니 차선을 무시한 채 위험천만하게 다른 차들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thin-skinned답게 차를 몰 때도 소심한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쪽 편에서 갑자기 나타난 승용차와 정면충돌하는 것이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차도 저편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떴으니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남은 없고 나만… 시선 안 두렵나
가슴이 벌렁벌렁한 채로 집에 오면서 난 생각했다. 남에게 비난 안 받고 민폐 안 끼치고 살자니 사는 게 참 불편해서 가끔 ‘피부 두꺼운’ 사람들이 부럽지만, 그래도 법 무시하고 남 생각 않은 채 제멋대로 하다가 저런 꼴을 당하느니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피부 두꺼운’ 사람들 흉볼 수 있는 게 참 다행이라고.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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