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형완]아듀, 내 청춘의 단관극장

  • 입력 2007년 11월 24일 03시 04분


언제부턴가 극장을 간다는 게 단순히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닌 시대가 됐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끼고 여러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멀티플렉스 극장 덕분이다. 쇼핑하러 나온 김에 시간 맞으면 영화를 보는 사람이 많다. 이제 영화 관람은 모처럼의 호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궤를 낮춰 자리매김 했다. 효율과 편의성의 극대화를 모토로 하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단관극장들은 재빨리 멀티플렉스로 옷을 갈아입거나 사라졌다.

이제는 ‘영웅본색’을 보기 위해 굳이 화양, 명화, 대지극장 중 하나를 택해 나설 필요가 없고 ‘플래툰’을 보기 위해 국도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설 필요도 없다. 매진 사례를 기록한 극장이면 어김없이 등장했던 암표상의 뿌리치기 힘든 유혹도, ‘라밤바’나 ‘사랑과 영혼’을 상영 중인 극장 앞에서 영화 주제곡의 불법 복제 테이프를 팔던 노점상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바로 앞자리의 앉은키 큰 아저씨 덕분에 영화 보는 내내 고개를 이리저리 길게 빼며 불편해했던 기억도, 잦은 상영으로 손상된 필름으로 인해 스크린에 스멀스멀 비가 내리던 풍경도 까마득한 옛 이야기다.

조만간 서울 시내 마지막 남은 단관극장이 재개발을 이유로 사라진다고 한다. 극장 측이 폐관하는 날까지 ‘더티댄싱’을 상영하는 마지막 축제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극장 이름도 바꾸고 부분적으로 개보수를 했지만 규격화된 화려함으로 치장한 멀티플렉스와 비교해 보면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선 극장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멈춰 버린 유적 같은 느낌을 줬다.

언제나 그랬듯 불이 꺼진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짧은 순간이지만 기분 좋은 설렘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이곳에서 지낸 순간들이 어둠을 뚫고 한줄기 빛으로 스크린에 드리워진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며 분연히 쌍권총을 들고 사지로 뛰어든 저우룬파(周潤發)의 죽음을 지켜본 소년들은 롱코트 자락으로 거리를 쓸면서 성냥개비를 빼물었다. 피투성이 손으로 공중전화 수화기를 움켜쥔 채 아내에게 갓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어 불렀던 장궈룽(張國榮)의 애잔한 미소에 소녀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때가 분명 이곳이 맞았던 찬란한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이곳의 가장 빛나는 시기라 할 수 있는 장면들은 하필 죄다 죽음 아니면 죽음과 맞먹는 비극이다. ‘천녀유혼’의 왕쭈셴(王祖賢)은 시작부터 이미 죽은 혼령이었고, ‘열혈남아’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류더화(劉德華)는 연인 장만위(張曼玉)를 알아보지 못한다.

입시에 찌들었던 나는 그들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어깨를 짓누르는 생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그 시절 이 극장에 걸렸던 일련의 홍콩영화들이 또래들 사이에 불러일으킨 신드롬은 가히 종교적 숭배와 비슷했다. 이곳은 성전(聖殿)이었다. 세월이 흘렀고, 성전의 열성적인 신자 중 하나였던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됐다.

‘더티 댄싱’의 후반부, 휴양객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해 마련한 종업원들의 합창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나이 지긋한 사장의 신세 한탄이 귓가를 콕 찌른다. “이제 누가 휴가철에 여기 와서 춤을 배우겠어? 유럽 여행이 유행이라더군.”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몇 해 전 만우절엔 거짓말처럼 장궈룽이 죽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극장을 나서는데,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로비 중앙 샹들리에가 신기한지 연방 디카로 찍고 있는 앳된 소녀가 보인다. 20여 년 전, 철없던 소년이 무심코 이곳에 들러 보게 된 영화가 그랬듯이 마지막 단관극장에서의 영화 한 편이 소녀의 마음속에 어떤 싹을 틔웠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김형완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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