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알파걸과 살아야 할 아들 키우기

  • 입력 2007년 11월 28일 03시 05분


선남선녀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 나붙었다. 청첩장이 사내게시판에 등장하는 일이야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번엔 특별한 내용이 있어 옮겨 본다. ‘○○○ 씨(신랑)는 요즘 화장실에서 차분히 앉은 자세로 작은 일을 본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변함없이 지켜 온 남성으로서 전통적 볼일 보기 자세를 느닷없이 포기한 이유가 뭘까. 집에선 앉은 자세로 볼일을 보는 게 여자를 배려하는 에티켓이라고 신부가 그랬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좌변기에 앉아 작은 일을 보던 날, 그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소박한 행복을 느꼈다.’

똑똑한 여자, 찌질한 남자

결혼 청첩장 속에 삽입된 이 글을 본 남자들의 반응은 반으로 쫙 갈라졌다. 우선 30대 중반 이상의 반응. “못난 놈. 마누리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지만 마누라가 시킨다고 앉아서 볼일을 본다고? 진짜 말세다.” 반면 30대 중반 이하 남자들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라고 공감을 표시했고 일부는 자신도 그렇게 한다고 털어놓았다.

여자들의 반응은 예상대로 열광적이었다. ‘신부가 똑똑하다’ ‘나도 남편에게 저렇게 시켜야 할 텐데’ 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들을 좌변기에 앉혀 소변을 보도록 훈련시키고 있다’는 엄마들도 있었다. 소변보기 자세의 변화는 좌변기 생활화에 따른 습관상 변화일 뿐 큰 의미는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내겐 남녀 간 역학구조가 바뀌는 상징으로 비친다.

수만 년간 지속돼 온 남녀 간 영역과 역할이 바뀌는 ‘거대한 전도(顚倒)’가 일어나고 있다. 실력과 자신감, 리더십을 갖춘 여성들이 사회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어제 발표한 사법시험 합격자의 35%가 여자다. 변화속도가 너무 빨라 남자가 지나치게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올 정도다.

‘아들이 여자 아이한테 맞고 다닌다.’ 요즘 아들 가진 엄마들의 고민 중 하나다. 여자를 차마 때릴 수 없어 맞는 것이 아니라 진짜 흠씬 두들겨 맞는다고 한다. 내신 상위 등급을 여학생이 싹쓸이하다 보니 아들 가진 학부모는 남녀공학 학교를 피하기 위한 이사까지 다녀야 한다. TV 드라마에서도 ‘찌질한 남자’가 남성의 표준처럼 돼 버렸다.

미국 아동심리학자 댄 킨들존은 공부,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새로운 여학생을 ‘알파걸(alpha girl)’이라고 칭했다. 내 주변에도 똑똑한 여자가 넘치다 보니 이런 조류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다. 정작 내 관심사는 남자 아이들이 알파걸과 조화롭게 살아갈 준비가 돼 있는가이다. 알파걸은 출발부터 이전 세대와 다르다. 성장기에 부모에게서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았고 학교에서 어떤 속박이나 제약도 받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의식도 없다. 차별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남자를 적대시할 까닭이 있겠는가.

‘강한 남성’ 신화, 부모부터 버려야

요즘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혹자는 여성의 뇌가 복잡한 사회에서 동시다발적인 정보 처리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몸을 사용해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서 남성의 체력(體力)이 진가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유가 어쨌든 이제 ‘마초’ 아들을 키워선 재미 보기 힘들어졌다.

알파걸은 결혼 상대로 자신처럼 뛰어나고 지도력을 갖춘 ‘알파보이(alpha boy)’를 찾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파걸은 많고 알파보이는 드물다. 어쩔 수 없이 알파걸도 능력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남자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을 맞이할 것이다. 아내의 자아실현을 잘 도와준다거나 자상한 아빠가 될 것 같다거나 하는 다른 특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자질을 갖춰 주도록 키우는 것이 요즘 아들 가진 부모의 역할이다. 여자가 강해지는 만큼 남자는 부드러워져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 아들 녀석의 소변보는 습관부터 살펴야겠다. 나중에 똑똑한 며느리한테 소박 맞지 않도록 말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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