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고어 부통령의 2000년 대통령 선거 패배 인정 연설 장면도 그랬다. 절대득표수에서 이기고도 문제투성이 투표용지 때문에 선거 승리를 반납해야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연설 동영상을 다시 돌려 보았다. 그는 승자보다 더 대통령다운 풍모로 “조지 W 부시 당선자에게 주어진 국가경영의 의무에 신의 축복을 빈다”고 했다. “미국의 법치는 위대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이 올여름 백악관 브리핑 룸 보수 공사를 마친 뒤 재개관 행사에서 한 발언도 진심만 담긴 것인지 의문이었다. 기자들이 사시사철 부시 행정부를 호되게 비판하는 무대인 그곳은 반(反)부시 여론의 진앙(震央)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행사에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는 독특하며 상호 필요한 관계다. 나는 이런 관계를 즐긴다”고 말했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선거에서 진 뒤 1993년 퇴임을 앞두고 당선자 빌 클린턴 부부를 백악관에 초대했다. 그는 “빌, 내가 떠나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소. 선거운동은 이미 끝났으니까. 당신이 추진할 정책이 나 때문에 꼬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거요”라고 했다.(마크 업디그로브 ‘인생 2막’)
그는 심지어 퇴임 당일 아침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당신을 응원하겠다”는 친필 메모를 써 놓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 연설을 앞두고 잠시 들렀다가 그 메모를 읽었다.
이런 모습만 떠올린다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을 꽤 인정했던 걸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도 2000년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이 대선에 뛰어든 아들(현 부시 대통령)을 “참 못났다”고 논평하자 참지 못하고 흉중을 털어놓았다. MSNBC 방송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이런 식이라면 나도 인간적으로 클린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입을 열겠다”고 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정치인도 신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고 작심한 듯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렇더라도 퇴임 직전 후임자에게 보인 호의는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워싱턴의 호사가들은 “아버지 부시가 클린턴에게 ‘난 이렇게 다르다’며 한 방 먹이고 싶었던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이 정치인들의 일반적 행동기준이라고 보긴 어렵고, 그런 행동을 이끌어 낸 깊은 속내를 가늠할 방법도 없다. 다만 지도자들의 이 같은 행적이 하나씩 기록되면서 미국 정치사에 ‘아름다운 존중’이라는 벽돌이 쌓여 갔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헌법의 가치는 더 빛났고,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은 존중을 받게 됐고, ‘대통령 직(職)’이 갖는 무게감이 새삼 부각됐던 것이다.
만약 고어 부통령이 패배를 승복 못하겠다고 버티고, 부시 대통령이 ‘비판 언론이 밉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퇴임을 전후로 후임 대통령을 비난하는 데 열중했다면? 가까이는 다음 날 아침신문이, 멀게는 후세 사가들이 그들의 경박함을 꼬집고 나섰을 것이다.
지금 한국도 정치의 계절이다. 정치인들로선 유권자를 상대로 한 연기(演技)의 계절이기도 하다. 전현직 대통령이건, 국가경영을 꿈꾸는 대통령 후보건, 말단 선거운동원이건 내키지 않더라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더없이 명확하다. 바로 ‘아름다운 존중’이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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