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주성]이념보다 경제, 공약보다 신뢰

  • 입력 2007년 12월 5일 03시 02분


경제학은 합리적 선택의 학문이라고 가르치는 나지만 정작 실생활에서는 비합리적일 때가 많다. 과식이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뷔페식당에만 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 뱃살을 빼는 방식도 단순하다. 허리가 불었다 싶으면 일부러 예전 치수의 새 바지를 산다. 건강은 둘째 치고 당장 들인 돈이 아까워 결사적으로 운동을 한다. 이런 내가 과연 정상적인 걸까.

대다수 사람에게 경제적 유인(誘因)보다 강하고 지속적인 유인은 드물다. 문제는 나의 뷔페 습관처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유인에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인기영합적인 경제정책이 사라지지 않는다.

겉보기에 이번 대선은 매우 비정상적이다. 정책 대결은 사라지고 오로지 특정 후보의 도덕성 논란만으로 한 해가 갔다. 그런데도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떨어질 줄 모른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이 비정상적인 걸까. 나는 그 반대라고 본다. 그들 나름대로는 주어진 상황에 합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택이 사후적으로도 옳은 결정이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본란(2007년 7월 18일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번 대선의 큰 특징은 민생 경제가 정치 이념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만 떠들썩하지 남북문제나 진보 보수 대결은 처음부터 유권자들의 심중을 파고들지 못했다. 도덕성이 큰 이슈로 부각됐지만 낙태와 같은 이념 변수가 아니라 부패라는 인물 변수가 중심이 됐다.

가시적 실적 원하는 국민

이번 대선에서 이념이 큰 역할을 못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를 대변해 줄 정당 구조가 실종됐다. 범여권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진보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경제 변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졌다는 점이다. 경제가 좋을 때는 신념이나 가치 판단에 근거한 투표가 이루어질 여지가 커지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는 이념을 초월한 선택이 이루어지기 쉽다.

그런데 성장률이나 물가 같은 통상적인 경제지표를 보면 올해가 특별히 더 나쁠 것도 없다. 그동안 뭔가 구조적인 차원의 불만이 쌓인 것이다. 외환위기를 겪은 후 개인이나 기업이 겪은 가장 큰 변화는 불확실성의 증가다. 김대중 정부 5년을 거치며 유동성 위기는 넘겼지만 소득과 일자리의 변동성은 더 커졌다. 뭔가 확실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 유권자들은 2002년 대선에서 실적보다는 기대, 과거보다는 미래에 비중을 두고 투표를 했다.

그러나 지난 5년, 민생 문제의 불확실성은 줄지 않았다. 그 결과 이번 대선에서는 불확실한 기대보다는 가시적인 실적에 유권자들의 마음이 쏠린 것이다. 이 후보가 경제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선점한 것은 그의 공약이 아니라 현대건설이나 청계천 같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이번 대선의 화두를 ‘약속’이 아니라 ‘신뢰’라고 본다. 어차피 공약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선거라는 얘기다. 설사 정책 토론 중심의 선거전이 펼쳐졌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유권자들은 가급적 불확실성이 작은 선택을 하려 한다. 이념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림살이를 보는 시각이 보수화된 것이다. 몇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사교육비를 없애 주겠다는 식의 약속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자리와 미래 소득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모험적 선택이나 신념에 근거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미래지향적 토론 벌였으면

이러다 보니 가시적 경제 실적의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 범여권은 상대의 신뢰를 깎아내리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반면 이 후보는 몸 사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다 이해는 되지만 불행한 일이다. 나라 장래를 위해서는 미래를 위한 약속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런데 선두 주자나 그를 공격하는 측이나 너무 과거 지향적이다. 경제가 쟁점인데도 후보들의 경제 공약이 미래 환경에 적합한지 따져 보는 토론은 찾기 어렵다.

성장률 공약 같은 근시안적 유인에 유권자들은 흔들릴 수 있다. 대부분 뷔페식당에서 나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배고픈 상태다. 하지만 지도자라면 유권자들의 ‘묻지 마 식’ 결정을 유도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기더라도 떳떳하게, 지더라도 국민을 위해 바른 소리를 하다 지는 것이 지도자의 정도다. 도대체 왜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지 후보들에게 묻고 싶은 대선이다.

전주성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경제학 jjun@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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