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젊은 사랑, 황혼의 사랑

  • 입력 2007년 12월 11일 03시 01분


‘영원한 행복이 없듯/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쓴 연애 소설 한 대목이다. ‘사랑받은’과, ‘사랑한’…. 나는 어느 쪽일까. 얼마 전 보도된 미국의 샌드라 데이 오코너(77) 전 대법관의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다들 못해 봐서 안달인 대법관 자리를 내던지면서까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을 돌보려 했다. 한데 아내를 기억 못 하는 남편은 요양원에서 할머니 환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권세와 사랑을 한꺼번에 떠나보낸 셈인데, 오코너는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담담히 얘기한다. 그를 통해 노년의 사랑을 조명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한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어서의 사랑(young love)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old love)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그 차이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의 거리이기도 하다.

사랑은 젊음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신호는 주변의 몇몇 책에서도 눈에 띈다. 나이 든 이들의 사랑을 들여다보는 이 책들은 ‘받는 만큼 준다’는 오늘의 계산적인 사랑법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 하나같이 나보다 상대를 더 아끼는 넉넉한 마음의 기쁨을 일깨운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겨우 한 계절이지만…만석 씬…내 인생 전체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홀로 사는 할머니와 아내를 먼저 보낸 할아버지의 만남을 다룬 강풀의 만화에 담긴 순정한 고백. 한평생 고단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어떤 수사보다 진실하게 다가온다. 사랑이란 게 거래 조건이 틀어지면 계약을 파기하는 유희적 비즈니스 이상의 그 무엇임을 귀띔한다.

‘나는 그분한테 뭔가를 받고 싶어서 결혼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내가 그분한테 뭔가를 해 주고 싶어서 결혼하기로 했던 거지.’ 또 다른 일본 소설에선 노년의 결혼을 앞두고 남자가 쓰러진다. 그 앞에서 할머니는 나이 들면 사랑에 무감각해진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편견인지 당당히 보여 준다.

생 후반부에서의 사랑은 그저 만화나 소설에서 꾸며 낸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이라면 84세 노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가 시각 교정에 도움이 된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9월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 온 아내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해 전 세계를 울렸다.

저무는 세밑의 끝자락, 다들 아쉽고 뜻대로 안 된 일도 많을 터다. 그래도 곰곰 생각해 보면 숨이 남아 있는 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혼이 굳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늙어 간다면 나이 먹는 것도 그다지 불평할 일은 아니리라.

사족: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꼭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젊은 연인들께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행복’)’는 시 구절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를….

고미석 문화부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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