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는 각 도의 수군절도사가 수군을 지휘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의 지휘 계통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이 바로 초대 해군작전사령부 사령관이다. 이순신은 3도 수군의 본부인 통제영을 한산도에 두고 수군을 총지휘해 여러 전투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삼도수군통제영, 즉 작전사령부는 기지를 한산도에서 통영으로 옮긴다. 6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경준이 본영을 고성에서 두룡포(통영의 옛 이름)로 옮기고 이듬해인 1604년(선조 37년)에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세병관을 창건했다. 이후 약 290년 동안 통영은 3도 수군을 총지휘했던 작전사령부 기지였다. 조선 수군은 189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체됐다. 209대 홍남주 통제사를 마지막으로 통영 시대는 끝났다.
대한제국은 근대해군을 양성해 보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중단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압박으로 대한제국은 1906년 8월 27일 진해를 군항 예정지로 한다고 관보로 고시했다. 일본은 1912년 방비대를 진해로 이전하고 이어 1916년 4월 진해만요항부를 개설한 뒤 사령관을 임명한다.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일본 해군이 진해군항을 장악했다.
광복이 되자 한국 해군의 선구자 손원일과 그의 동료들이 한국 해군을 창설했고 1952년 8월 1일 한국함대사령부를 진해에 뒀다. 해군이 함대사령부 외에도 진해에 해군사관학교, 교육사령부, 제2사관학교, 해군대학을 건립하면서 진해는 한국 해군의 요람이 되었다. 작전사령부가 부산으로 이전해도 진해에는 해군의 주요 기관이 계속 머물러 진해와 부산은 광역화된 기지 개념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한국 해군의 주요 기지를 왜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는지 많은 국민이 궁금해한다. 해군작전사령부의 이동은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해군력 자체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진해만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되는 천혜의 군항이다. 하지만 수로가 복잡하고 수심이 얕아 이지스 구축함 등 대형 함정의 입항이 용이하지 않은 단점이 있다. 또 앞으로 해안 경계 임무가 강화되므로 다른 군과의 합동작전이 필요해진 점도 주요한 이유가 된다. 부산 해군기지는 대양에 해군력을 조기 배치할 수 있고 동해와 서해를 비롯한 우리의 전 해역에 대형 함정을 신속하게 출동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부 전문가는 부산 항구가 진해 군항과는 달리 외부에 노출돼 있지 않느냐고 우려한다. 하지만 지금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과 레이더가 워낙 발달해 해군기지나 함정이 산악으로 보호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부산 작전사령부는 민항이 바로 옆에 있다. 또 주민이 해군 함정을 볼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해군이 국민과 함께 생활하며 활동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국민의 성원으로 건조된 군함을 국민이 방문하고 멀리서도 식별한다면 해군을 더 신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부산으로의 해군기지 이전은 대양해군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전쟁 도발을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양으로 나아가 해상교통로를 보호하고, 교민 보호와 에너지 수급을 지원하면서 국가 이익에 직접적으로 공헌하게 될 것이다.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교수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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