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문명]두려움

  • 입력 2007년 12월 18일 03시 01분


코멘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광고회사 직원 대니얼은 36세 생일 기념으로 오픈카를 뽑아 질주하다 마주 오던 트럭과 충돌해 죽는다. 망자(亡者)의 영혼이 간 곳은 ‘심판의 도시’라는 생(生)과 사(死)의 중간세계. 이곳의 판관들은 이승에서의 망자의 삶을 그동안 찍어 놓은 영상으로 보면서 지구보다 더 나은 별로 보낼지, 다시 지구로 돌려보낼지를 심판한다. 기준은 얼마나 ‘두려움(fear)’ 없이 살았느냐다. 판관은 말한다. “두려움이 적었던 사람들은 지혜로웠던 사람들이다. 삶의 평온이나 지혜는 두려움이 없을 때 나온다. 행복, 즐거움, 자신감 같은 감정을 가리는 가장 큰 적이 바로 두려움이다.” 미국 영화 ‘영혼의 사랑’에 나오는 얘기다.

▷김연아가 15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파이널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1라운드 경기에서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누른 것도 두려움을 이겨 낸 내면의 힘 덕분이다. 두 선수는 3회전 공중 점프에서 같은 실수를 했다. 아사다는 당황한 듯 다음 점프를 못하고 주저하다 퇴장했지만 김연아는 달랐다. 차분하게 고난도 점프를 이어 갔다. 우승 후 그는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오로지 다음 동작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려움은 삶과 죽음도 가른다. 20여 년간 말기 암 환자들을 봐 온 서울대 의대 방영주 교수는 “암도 결국 두려움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병이 주는 육신의 고통보다 절망이 주는 마음의 고통이 환자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암 통보를 받으면 으레 허무감과 분노, 자책,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마음이 약해져 삶의 의지를 잃고 만다는 얘기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신(神)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은 영화 ‘색, 계’의 남자 주인공 ‘이선생’처럼 내면의 두려움을 애써 억눌러 가며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모진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텨 나가는 것은 아닐까.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완성의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겸손”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구를 위안 삼아서.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