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세상/김규한]한국 온 과학사랑 ‘구사카베 실험실’

　

김규한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에서 조촐하게 열렸던 실험실 개소식이 생각났다. 7월 인천 송도 갯벌타워에 들어선 구사카베 실험실(Kusakabe Lab). 극지연구소가 브레인풀 초빙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시작해 1년 만에 만들었다. 우주물질을 연구하기 위해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하는 첨단 연구 실험실이다.

구사카베 실험실이 생겨 국내에서 처음으로 운석과 같은 우주물질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주는 산소 안정 동위원소 분석의 꿈이 실현됐다. 설치된 질량분석 장치는 앞으로 우주물질은 물론이고 지구물질의 기원과 환경연구로 응용 범위가 확대될 수 있는 장비다. 기초과학 실험시설이 빈약한 국내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 환경에서 구사카베 실험실이 주는 의미는 크다.
실험실을 만든 주인공은 일본 오카야마대 부설 지구물질연구센터에서 정년퇴임 때까지 안정 동위원소 연구 분야를 개척한 구사카베 미노루(日下部實·66) 교수다. 그는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다. 아프리카 카메룬의 니오스 호수 화구호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건의 원인 규명과 자연재해 예방 대책 연구 활동을 통해 잘 알려졌다. 니오스 호수의 대폭발은 1986년 8월 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화산대의 니오스 화구호에서 일어났다. 이산화탄소 등 독성 가스의 대폭발로 호수 인근에 살던 주민 2000여 명이 숨졌다.
구사카베 교수는 오카야마대에서 평생을 연구하는 동안 가장 아끼던 고가의 산소안정 동위원소 분석용 질량분석장치와 부대시설을 모두 한국으로 옮겼다. 일본에서 가져온 장비와 부품을 갖고 밤늦게까지, 주말도 없이 직접 실험실을 디자인하고 조립하고 설치했다. 일본 대학의 실험연구실이 한국 연구소의 실험실로 완전히 이전해 새로운 시설이 됐다.
그는 초빙연구원으로 남극과 북극의 극지환경에서 산출되는 열수와 가스의 기원을 한국 연구진과 함께 연구했다. 시료 처리 기술, 동위원소 분석 기술과 실험실 관리 운영의 노하우를 한국 후학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국가의 장벽을 넘어 소리 없이 보여 준 외국 원로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과 땀으로 인천 송도 과학연구단지에 국내 최초로 우주물질 산소 동위원소 연구실험실이 불을 밝히게 됐다. 이 실험실은 앞으로 국내외 우주물질 동위원소 연구의 메카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교수나 연구자가 연구기관을 옮길 경우 연구자가 사용하던 고가의 시설을 모두 가져갈 수 있다. 실험연구를 중시하는 이 같은 제도는 연구시설의 활용도를 높이고 연구 인프라를 신속히 복원해 연구의 생산성을 높이고 연속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우주물질과 지구물질 응용연구의 개척을 바란다는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조용히 본국으로 떠나갔지만 그가 남긴 실험실은 한국의 기초과학기술 개발사에 오래오래 기록될 것이다. 또 한일 과학기술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차세대 한일 과학기술 교류의 발전적인 디딤돌이 되리라 생각한다.
열악한 기초과학 실험시설의 개선을 염원하는 한국 과학자에게 구사카베 실험실은 새로운 가능성과 꿈을 심어 줬다. 과학기술 국제 협력의 새로운, 보기 드문 성공 사례이기도 하다. 새 정부가 새로운 기초과학 연구단지를 조성해 국내에서 첨단과학 실험실이 계속 나오기를 바라며 구사카베 교수의 국경을 넘은 과학 사랑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김규한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