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실용주의라는 시대정신

  • 입력 2007년 12월 26일 02시 58분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진보에서 보수로 거대한 권력 이동이 시작됐다. 담론 투쟁의 지평에서는 실용주의와 경제가 다른 화두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번 대선의 큰 흐름은 ‘잃어버린 10년’과 ‘되찾은 10년’ 사이의 대결에서 결판났다. 민심은 ‘잃어버린 10년’ 담론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원래 말싸움에 능한 진보 세력이지만 민생고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환멸이 부른 총체적 민심이반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충격적인 대선 패배와 전망이 암담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 진영은 회복 불능으로 망가진 것일까?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중장기적인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시민들의 이념 지향성 비율이 대략 진보 3, 중도 4, 보수 3을 가리키는 데서도 확인된다. 물론 여기에는 진보 세력이 뼈를 깎는 재생의 노력으로 민심에 다가가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고난의 길이겠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진보 지식인들의 자기성찰도 필수적이다. 노 정권하에서 이들은 현실 참여의 미명 아래 노골적인 정파적 편향성을 드러냄으로써 지식인의 생명인 객관성을 훼손했다. 정치공학과 결합한 이념적 당파성이 진보 담론의 타당성까지 파괴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공론 영역에서 진보 지식인들의 말과 실천이 갖는 설득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진보 진영이 말과 일의 헤게모니를 동시에 상실한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다.

실질적 성취 없을 땐 위기 빠져

보수 진영은 실용주의를 내세워 민심을 붙잡는 데 일단 성공했다. 소란스러운 이념의 말에 질려 버린 중도층이 실용적 보수에 한번 제대로 일을 해 달라며 권력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권력 변환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보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가시적 성과를 바라는 시민들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권력의 위임과 신뢰가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이기 때문이다.

이때 실용성의 잣대는 이중의 칼날로 작동한다. 공허한 이념을 공격하는 데 효과적이던 실용주의가 단기간에 실질적 성취를 과시하지 못할 때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그럴수록 실용주의는 속전속결의 이벤트성 업적주의의 유혹에 노출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핵심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기획은 이런 딜레마를 극적인 방식으로 예증한다. 비용과 위험성은 구체적인 반면 실질적 효과는 불투명하고 국민과의 합의 과정도 밟지 않은 거대 토건국가 프로젝트에 대한 과잉 집착은 실용성에 대한 편향적 이해의 소산이다.

이 점, 노무현 정권은 참으로 선명한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지역균형발전 이념으로 강행한 행복도시 혁신도시 등의 국토 개편 작업이 초래한 부동산 가격의 전국적 폭등이라는 재앙을 보라. 참여정부의 이념과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는 정반대인 것 같지만 민주적 소통을 빠뜨린 관(官) 주도의 거대 기획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한다는 문제를 공유한다.

결국 중도보수 정권의 성패 요체는 실용주의라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 달라’는 선거구호는 효과적이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국민 말은 듣지 않은 참여정부는 소통에 완전히 실패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달변이었지만 최악의 화자(話者)이자 청자(聽者)였던 것이다.

일 잘하기 위해선 말도 잘해야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말도 잘해야 한다. 민주적 의사소통과 검증에 충실한 리더십만이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실천적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는 실용주의가 일하는 능력과 함께 소통의 자질까지 갖추어야 함을 뜻한다. 설득과 비판이라는 말의 항체는 실용성의 기치가 천박한 기회주의나 업적만능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막아 준다. 말과 일은 민주적 실용주의를 비상(飛翔)하게 만드는 두 날개인 것이다. 말과 소통에 열려 있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리더십만이 일 잘하는 진정한 삶의 정치를 낳는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