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란 무엇인가. 그냥 한국에서 만들어 외국에 파는 문화콘텐츠다. 한류의 스타일은 뭔가. 딱히 정의되는 걸 본 적이 없다. 사무라이 영화나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처럼 딱 손에 잡히는 게 있나. 한류 드라마의 스타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유치하다는 거다. 미끈한 주인공이 목도리 두르고 기억상실에 사랑 쇼하는 드라마. 그런 드라마들이 일본 아줌마들을 휘어잡았다는 게 어이없는 거지 뭐 그리 대단한가. 호소력의 포인트는 뻔하다. 대놓고 유치해 주니까 짜릿한 거다.
노래도 그렇다. 한류랍시고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곳을 돌아다니는 음악들은 공장에서 찍어 낸 것처럼 반반하기만 하고 아무 매력도 없다. 미소년 미소녀들 뽑아다 합숙시켜서 제작자가 원하는 그대로 뽑아내는 표준생산 시스템 아이돌 밴드의 판에 박힌 음악들이 한류의 라벨을 붙이고 팔린다는 게, 인디 밴드를 하는 사람 처지에서 늘 창피했다. 한국에는 그런 인형 같은 가짜 음악만 있다고 외국 사람들이 생각할 것 같아서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파는 게 아니라 소통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내 나라 문화 상품이 잘 팔리는 거야 좋지만 그 땅에 원래 존재하던 문화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한류가 난입하기를 원하는 건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무엇보다도 소통과 공감의 장으로 한류를 설정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요즘 매만지고 있는 낱말이 있는데 바로 ‘모듈(module)’이라는 영어 단어다. 이 낱말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데 21세기다운 문화적 소통 방식을 설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을 품고 있다.
모듈은 ‘스스로 존재하고 자율적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시스템 안의 다른 부분들과 호환되기도 하는 구성 요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문화가 모듈이 된다. 모듈이 된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아프로’라는 접두어로 모듈이 된 아프리카 문화는 아프리카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형용사 ‘아프리칸’의 정체성이 아프리카를 떠나 흩어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집시 문화의 모듈은 유럽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각 지역에서 독특한 결합 방식을 가진 새로운 지역문화로 재탄생하고 모듈을 호환했다.
한 지역의 문화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서로 접속하고 결합하면서 새 모듈이 되고 그것들이 다시 호환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티베트 모듈’을 살펴보자. 티베트에서 나온 명상 문화는 하나의 모듈로 뉴욕이나 도쿄, 서울 등의 대도시에 존재한다. 그것은 티베트 자체는 아니다. 서점에 꽂혀 있는 티베트 고승의 수필은 때로 티베트의 정신을 거스르는 상업주의를 내포한다. 그러나 싫든 좋든 그 티베트 모듈은 달라이 라마의 순례처럼 티베트가 세상을 주유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한류로 해외에 팔리는 음악들 속을 들여다보면 재미나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중심 모듈은 한국의 모듈이 아니라 대개 아프리카 모듈이다. 아프리카 모듈의 핵심은 리듬과 비트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퍼뜨리고 있는 음악 안에서 호환성을 발휘하는 것이 사실은 한국 모듈이 아닌 아프리카 모듈인 것이다.
한국 문화를 모듈로 만들자는 얘기는 아니다. 바란다고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문화를 소통하는 방식, 호환하는 시스템에 대해 다시 새롭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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