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연욱]법치 세울 기회

  • 입력 2008년 1월 2일 02시 52분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선거 직후.

당시 김각영 검찰총장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A 검사를 파견하려고 했다. 현직 총장의 확실한 ‘추천장’이 있었지만 A 검사는 끝내 인수위에 들어가지 못했다.

검찰 주변에선 A 검사가 갖고 있었던 추천장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됐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가 김 총장의 사람이라는 게 중요한 결격 사유로 작용한 것이다. 새 정권의 주도 세력은 ‘김각영 검찰’을 인정할 수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김 총장은 2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다음 달에 옷을 벗어야 했다. 임명된 지 4개월 만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 내내 검찰은 견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검찰은 ‘서울대, 삼성, 언론’과 함께 손을 봐야 할 기득권 세력이라는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법의 논리보다는 감정적 대응이 앞섰다.

노무현 정부가 취임 초부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립을 검토했던 배경엔 검찰의 ‘힘’을 빼야 한다는 의지가 작용했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검찰이 독립적인 기관이지만 어디까지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휘하에 있다”며 검찰 내 팽배했던 불만을 비판했다.

2005년 10월 천정배 당시 법무부 장관이 꺼내든 사상 초유의 지휘권 발동 카드에 김종빈 검찰총장이 사표를 냈다. 당시 검찰 내부의 반발이 갈수록 거세지자 청와대는 ‘검찰권의 문민 통제’라는 논리를 동원했다.

청와대는 “정부기관 간 해석이 다를 경우 정부 내에서 최종적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며 법조계의 반발을 일축했다. 청와대의 ‘뜻’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대국민 메시지였다. 법치(法治)의 기본 전제가 밑동부터 흔들렸다.

‘선출된 권력’은 검찰의 대응을 도전으로 간주했다. 내심 “선출된 권력에 이럴 수 있느냐”는 오만이 배어났다. 주도권 싸움에서 밀릴 수 없다는 결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노 대통령이 ‘그놈의 헌법’이라며 헌법을 폄훼하고, 여권의 386세력들이 행정수도 이전을 위헌이라고 선언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맹비난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지난해 노 대통령이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낸 것은 차라리 ‘소극(笑劇)’에 가깝다.

청와대의 헌재와 중앙선관위 등 헌법기관 흔들기는 이들 기관의 위상 추락을 불러 왔다. 엄정해야 할 검찰의 수사 결과조차 정치적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해 검찰이 검사 12명을 합쳐 53명의 최정예 수사 인력을 투입한 ‘BBK 주가조작 사건’의 수사 결과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주도한 ‘BBK특별검사법’이란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한다.

이런 일이 헌정 사상 최초의 ‘법률가’ 대통령 시절에 벌어진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는 2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라도 감정과 응어리를 풀고 흔들린 ‘법치’를 바로 세우는 성숙한 모습을 기대해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가.

정연욱 사회부 차장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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