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맑지 않고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아. 혼미한 상태에서 바둑을 둔 것 같은 느낌이야. 삼성화재배와 LG배 세계대회 결승에 올라간 뒤 마음이 느슨해진 탓일까.’
이 9단은 속기로 두면서도 거듭 자책하고 있었다. 이젠 우변 백이 아무 피해 없이 살아도 진다. 윤준상 국수가 흑 157로 어깨를 짚는 순간 이 9단은 백 말이 살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후 수순은 매우 간단하다. 흑 161까지 백의 궁도를 줄이자 백은 한눈에 봐도 두 집 내고 살기는 어렵다.
‘두 수를 연거푸 둬야 살겠네.’ 이 9단은 쓴웃음을 지었다.
흑 163이나 165로는 참고도처럼 밖에서 포위해도 백이 살 길이 없다. 그러나 윤 국수는 그 정도로는 성이 안찬다는 듯 흑 165까지 백의 속살로 파고든다. 백은 한 집도 없다.
‘너무 후벼 파는 거 아냐.’ 이 9단은 순간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질 바둑, 백 돌은 살린 뒤 돌을 던지자.’
목표가 명확해지자 흐릿하던 정신도 맑아지는 듯하다. 이 9단은 자세를 바로 하고 수읽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해설=김승준 9단·글=서정보 기자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