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보수, 반동, 진보, 급진

  • 입력 2008년 1월 14일 02시 57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진보를 자처하던 정권들의 실적에 대한 강한 실망의 압축된 표현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경제생활의 안정, 국가경쟁력, 사회적 균형, 대외관계, 대북관계, 국격, 여러 면에서 우리는 전진 보다 후퇴를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독선적인 정권과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방향감각도 없이 마구 흔들어대는 가운데서도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를 젓던 국민의 역량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그들의 성숙된 정치의식이 드러난 것이 바로 지난 대선의 투표 결과였다.

이른바 진보좌파 세력이 두 번 연속 집권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우리가 얻어낸 매우 중요한 수확은 정권교체의 체험 그 자체였다. 권력에서 배제되어 온 세력들이 드디어 권력행사를 할 기회를 가져 봄으로써 이제는 국민 전체가 통치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도덕적 비분강개나 때 묻지 않은 듯한 얼굴이 정치적 역량에 대한 보장이 아님을 깨닫고 국민적 실익에 기초하지 않은 이념적 구호나 감상적 호소에 대해서 면역이 생긴 것이다.

정권교체 체험이 중요한 수확

대한민국의 정치가 건국 60주년을 맞으면서 드디어 낡아빠지고 다분히 위선적이 된 이념의 허울을 벗어 버리고 현실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선의의 대결을 벌이는 정당정치를 할 만한 성숙성을 보이게 된다면 10년이라는 세월은 치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대가가 아니었나 싶다. 민족 통일을 빙자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실익을 훼손하고 국민적 통합을 깨뜨리려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우리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분명히 보여 주었다. 양식과 양심이 있는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그 점을 숙연한 자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희망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보수는 어떤 세력이고 진보는 어떤 세력이 되어야 하는가? 보수는 무조건 기득권을 수호하자는 것이고 진보는 항상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자는 것인가?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이 진보에서 보수로 움직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아직까지도 은폐된 이념 대립이나 지역갈등을 넘어서면 정치적 철새들의 세상이 있었을 뿐 정치철학적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 세력이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몸체를 높이 날게 하는 양 날개의 구실을 하려면 그들의 생각을 가르는 철학적 차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 있는 사람이면 누구도 역사의 빠른 변화 추세에 대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를 수 없다. 다만 역사의 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에서 생각의 차이가 날 뿐이다. 보수로 기우는 사람들은 대체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는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만이 아니라 전통, 우연, 영성, 야성 등도 함께 작용함을 인정한다. 따라서 변혁에 대해 조심스럽고 민주주의의 양대 가치인 자유와 평등 중에서는 후자보다 전자에 더 무게를 싣는다. 진보 측은 인간 이성과 의지의 힘에 거의 무한의 신뢰를 걸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한 이상사회의 달성이 인간 의지로 가능하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과감한 사회개혁을 주창한다.

상호보완 기능 작동하는 사회

합리적 보수와 온건한 진보 간에는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으며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상호보완 기능을 한다. 그러나 보수가 공동체의식을 잃고 이기적으로 흐를 경우에는 수구 반동으로 전락하며, 진보가 타협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교조적이 될 때는 급진적 혁명세력으로 변질되어 파괴력을 발휘한다. 그런 의미에서 반동은 합리적 보수의 적이 될 수 있고 사회민주주의가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효율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계파 간 갈등이 아직도 정치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마당에 이런 논의는 잠꼬대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잠꼬대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정치의 수준을 높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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