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는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다른 친구는 대선 전에 캐나다로 떠나 투표에 불참했다.
대선이 끝난 뒤 만난 다른 한 명은 “박근혜를 찍었다”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에게 기표했지만, 심정적으로 박근혜 후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선 때 박 전 대표를 지지했던 유권자 대다수는 이 중 하나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박 전 대표는 8월 경선에서 탈락했지만 12월 대선 투표일까지 유권자의 심리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 밑바탕에는 ‘아름다운 경선 승복’이 있었다. 이어 박 전 대표는 11월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에 대해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경선 승복이 ‘정치 쇼’가 아니었음을 보여 줬다. 반칙과 정치공학이 난무하는 사막 같은 한국 정치판에 모처럼 단비를 뿌린 장면들이었다.
그런 박 전 대표가 요즘 좀 달라진 듯하다. 무엇보다 화법이 달라졌다.
그의 말의 파워는 절제하다 던지는 촌철살인(寸鐵殺人)에 있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이다” “오만의 극치라고 본다”….
박 전 대표가 10일 쏟아낸 “공천이 잘못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겠다” 같은 직정(直情) 발언은 그답지 않다. 특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얘기는 승복의 드라마를 만든 ‘원칙의 정치인’ 박근혜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어 13일과 14일에도 연달아 공천 문제를 제기하는 다변(多辯)도 박 전 대표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절제의 미학을 아는 박 전 대표가 이처럼 직정적이고 말이 많아진 데는 경선에서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측근들이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이 공천 작업에 착수하지도 않은 마당에 미리 강경 언사를 퍼부은 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국민적 지도자’인 박 전 대표가 ‘박근혜파의 보스’로 작아지는 듯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는 박 전 대표의 우산 아래 공천을 따보려고 그의 눈과 귀를 잡은 측근들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 실세들의 책임 또한 만만치 않다.
‘좌시 않겠다’ ‘물갈이’ 발언 등으로 박 전 대표 측을 옥죈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에 이어 15일 공성진 서울시당 위원장까지 “이 당선인과 철학을 같이하느냐도 (공천의) 중요 변수”라며 가세했다. “총선에서 이회창 정동영 후보와 겨뤄 보고 싶다”고 한 데 이어 한나라당 기자실에 찾아가 인사권자처럼 조각(組閣) 구상을 밝힌 ‘정두언 실세’의 거침없는 언행도 마찬가지다.
이번 총선은 지난 대선과 다르다. 이제는 한나라당에 노무현 대통령이 미워서 투표하는 보너스는 없다. 한나라당이 밥그릇 싸움에 빠져 ‘전 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고 미래로, 세계로 나아가라’는 대선의 민의를 저버리는 것이야말로 ‘오만의 극치’다. 그러면 4월 총선에서 말 그대로 ‘국민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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