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가 세계적인 투자은행(인베스트먼트뱅크·IB)인 메릴린치에 2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세계 금융의 중심부에 이제 겨우 한쪽 발을 내민 것에 불과하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글로벌 IB들의 주가가 크게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몇 년 뒤 이익을 낼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투자의 세계에서는 요행수가 계속 통하지 않는다. 투자대상 기업의 가치를 분석하고 시장상황을 예측하는 남다른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실패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세계 금융시장에선 국부펀드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각국의 금융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다. 중국만 하더라도 작년 9월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를 설립해 한국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모건스탠리 등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면서 ‘차이나 달러’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의 특성상 KIC가 고위험 고수익 자산에 대한 투자비중을 늘리기는 쉽지 않다. ‘전주(錢主)’인 한국은행과 재정경제부의 투자지침이 까다로운 데다 의사결정 구조가 복잡해 시장 변화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KIC 측의 항변도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KIC는 시장의 신뢰를 높이지 못한 것을 자책(自責)해야 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보유한 국가의 국부펀드로서 위상에 걸맞은 실적을 내지 못했고, 운용인력의 실력도 믿음을 주지 못했다. 자신이 없다면 겸허해져야 한다. 비싼 몸값을 주고서라도 국내외 시장의 일류들을 적극 영입해야 한다.
정부는 KIC의 자산규모를 현재 200억 달러에서 2010년 500억 달러로 늘리고 투자대상도 해외 부동산 등으로 넓힌다는 방침이다. ‘국가 재테크’의 첨병으로 국민의 소중한 재산을 굴리려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성적으로 입증하는 게 먼저다. 당국도 사사건건 통제하려는 관료적 발상에서 벗어나 국부펀드의 역량을 키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진짜 프로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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