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쇳물 名匠의 행복한 은퇴

  • 입력 2008년 1월 20일 19시 56분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명장(名匠)님’으로 불리는 조업지원팀 전상호(60) 차장은 쇳물 만드는 기술자로만 35년을 일했다. 전문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서울 세운상가에서 월급 1만 원짜리 선반공으로 일하다 입사 공고를 보고 포항제철에 지원했다. 포항제철소에서 11년 동안 일하고 광양으로 옮겨 모래 바람 속에서 바다를 메워 광양제철소 신화를 만든 1세대다. 그는 포스코 창립 40주년이 되는 올해 4월에 정년퇴직한다.

퇴직을 해도 이곳저곳에서 오라는 곳이 많다. 해고되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사무직 근로자들에 비해 행복한 은퇴다.

현재 연봉은 억대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노후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동기들 중에는 재테크로 서울에 집을 사 놓은 사람들도 있고, 차를 2대씩 굴리며 자사주(自社株)가 몇십 배씩 올라 현금 자산만 10억 원을 훌쩍 넘는 자산가도 있다. 젊은 시절부터 회사 스포츠센터에서 골프 승마 스케이트를 배워 퇴직 후 다양한 취미를 즐기며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

가난한 청년기를 보냈던 전 씨는 포스코 입사와 함께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집 장만은 물론이고 자녀 교육까지 직장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그의 삶은 ‘좋은 일자리가 곧 복지’라는 말을 확인시켜 준다.

포스코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중졸 고졸 전문대졸 생산직이지만 대도시 대졸 화이트칼라(사무직 근로자)보다 나은 삶의 질을 누린다는 점에서 ‘네오 블루칼라(Neo blue collar)’다. 요즘 작업 현장은 화이트니 블루니 하는 구분도 모호하다. 광양제철소의 모든 공정은 전산화돼 먼지와 기름때에 절어 있는 노동자는 찾아볼 수 없다. 위험한 일은 로봇과 기계가 대신하니 사람이 하는 일은 컴퓨터와 모니터로 최고 품질을 만드는 ‘결정적 순간’을 판단하는 것이다.

전 씨는 “좋은 기업에 들어오면 학력 차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젊은이들이 좋은 대학 입학이 아니라, 좋은 기업 입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술자나 기능공이 되고 싶은 사람들까지 대학교육이 필요하냐”며 “공부가 하고 싶다면 직장을 잡은 이후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와는 담쌓기 마련인데 그는 가방끈 짧은 게 오히려 자극이 됐다. ‘고품질 강철(鋼鐵)’ 제조를 화두로 주경야독해 직장을 다니면서 학사,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싼 대학 등록금을 투자하지 않고 남보다 일찍 돈을 벌면서 박사 학위까지 땄으니 ‘저비용 고효율’의 성공한 삶이다.

그는 기술자 예찬론자다. 직장에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평생 일할 수 있고 승진에 목맬 필요가 없다. 동료와의 경쟁보다 기술 숙련을 향한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점도 매력이다. 그는 1995년 9월 노동부가 인증한 ‘명장’이 돼 상금 2000만 원을 받았고 매달 100여 만 원의 수당을 수령한다.

일본 와세다대 후카가와 유키코 교수 말대로 “세계 어디에도 대졸자에게 맞는 직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0%대로 세계 최고다. 한쪽에선 실업난이라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구인난으로 아우성친다. 대학과 직장을 선택하는 젊은이들의 사고에도 ‘실용(實用)’이 중요함을 전 씨의 삶이 깨우쳐 준다.

―광양에서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