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푸른 눈 아줌마, 한국아줌마

  • 입력 2008년 1월 25일 03시 00분


행사장에 들어선 아이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방에는 색종이와 풍선이 가득하고 그들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도 걸려 있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들을 초청한 외국인 아줌마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아이들을 맞아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피자 만들기 시간이 되면서 사라졌다. 아줌마와 함께 밀가루 반죽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즐거운 하루를 보낸 아이들은 처음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아쉬운 표정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줌마들도 섭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주는가 하면 아이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 사는 외국인 주부들은 아동복지시설 S원 원생들을 초청해 조촐한 신년 파티를 열었다. 부모의 정이 그리운 아이들과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보듬어주는 외국인 주부들이 만들어내는 온기로 현장은 따뜻했다.

이 행사는 10여 명의 외국인 주부가 마련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봉사활동을 통해 한국인들과 친해지기로 뜻을 모았다. 40명이 넘는 불우 아동을 위한 행사를 벌이기에는 사람도 돈도 부족했지만 ‘되는 대로 하자’면서 밀고 나갔다. 비용은 각자 형편 닿는 대로 내놓았다. 행사장은 아파트 1층 식당의 양해를 얻어 식당 한편을 공짜로 빌렸다. 아이들에게 줄 선물은 각자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 마련했다.

이 주부들은 국적도 다르고 연령대도 다르다. 한국에서 거주한 기간도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봉사활동이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인 재니스 씨는 고국에서 10년 넘게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 주는 봉사를 했다. 스웨덴에서 온 한나 씨는 버려진 동물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다. 캐나다 출신 엘리너 씨는 아들 학교에서 자원봉사 양호교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선진국일수록 여성, 특히 주부들의 봉사활동 참여는 활발하다. 여유 시간이 늘어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들의 사회 참여 욕구가 커지기 마련이다. 미국 유럽에서 주부는 가장 큰 자원봉사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주부들의 사회봉사 성적표는 초라하다. 최근 한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85%의 주부가 봉사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는 주부들만 탓할 일은 아니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이고 자녀 교육, 재테크, 남편 출세까지 모든 것을 챙기는 ‘만능선수’ 역할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부들이 사회봉사에 눈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희망적이다. 최근 우리는 충남 태안 기름 유출 사고지역에서 방제작업에 참가한 수많은 주부 자원봉사자를 보았다. 초기에 학생, 직장인이 많았던 것과 달리 주부 봉사자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나는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단체로, 혹은 개인으로 이곳을 찾은 주부들의 얼굴에서는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엿볼 수 있었다.

앞으로 태안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봉사 현장에서도 이런 만족스러운 한국 아줌마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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