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1603∼1867)의 도쿄는 이런 말이 생길 정도로 화재가 잦았다. 화마가 1.6km 이상 뻗어나간 큰불만 따져도 3년에 1번꼴이었다고 한다. 화재가 빈번하다 보니 서민들의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렵게 장만한 살림살이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은 물론 귀중한 생명을 잃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화재로 이득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요지에 땅을 가진 사무라이들은 화재위로금과 재개발로 불이 나기 전보다 재산이 불어나는 일이 많았다. 일본인들은 이런 현상을 ‘야케부토리(燒け太り)’라고 불렀다. ‘야케’는 불에 탄다, ‘부토리’는 재산이 불어난다는 뜻.
소방기술이 발전하면서 도쿄에 과거처럼 큰불이 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야케부토리는 지금도 일본인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다만 말뜻은 바뀌었다. 어떤 악재(惡材)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조직을 살찌우는 관(官)의 모습을 야케부토리라고 한다.
고쿠가쿠인(國學院)대 미즈타니 미쓰히로(水谷三公·정치학) 교수는 패전 후 일본 사회의 주도권을 관료가 잡게 된 것부터 야케부토리라고 설명한다.
“패전이 군부라는 거대한 지뢰원(地雷原)을 제거했다. 더불어 정계와 재계의 약체화(弱體化)도 진행됐다. 저항세력이 없어진 관료가 독주하는 시대가 출현했다. 관료가 야케부토리한 것이다.”
일본 현대사에서 관료 득세가 반드시 부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관료가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야케부토리가 마땅히 정리돼야 할 종착점을 지나서까지 계속됐다는 것이다.
권력의 단맛에 너무 오래 취한 나머지 자정 능력과 총명함을 상실한 관료조직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 4가지를 범했다. 첫째, 1980년대 후반 부글부글 거품이 끓어 넘치는 일본 경제를 식히지 않고 오히려 군불을 땠다. 둘째, 거품이 터지면서 탈진한 경제를 보양하는 대신 “투기를 방지한다”며 숨통을 졸랐다. 셋째, 부실채권을 정리해야 했지만 오랜 창구지도와 유착관계를 통해 금융계와 쌓아온 ‘정’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었다. 넷째, 칸막이 행정과 시대착오적인 규제로 민간의 창의성을 억압했다.
그 결과 일본 경제는 10년이라는 귀중한 세월을 잃어버렸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가 중앙부처를 절반으로 줄이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가 5년간 줄기차게 ‘작은 정부’를 외친 끝에 일본 경제는 가까스로 국제사회의 신인(信認)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본이 야케부토리의 부작용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바빴던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 정부 5년간 공무원 수가 6만여 명 늘어나고 그에 따라 인건비도 5조 원 이상 증가했다. 서민경제가 양극화와 내수 침체라는 불구덩이에 빠져 있는 동안 공직사회는 알뜰하게 살집을 불려온 것이다.
한국의 관료집단에는 현 정부 출범 초기 집권세력이 설익은 아마추어 정책을 마구잡이로 추진하지 못하도록 걸러낸 공이 있다. 하지만 코드 공무원들이 반(反)시장적 ‘전봇대’를 곳곳에 박아 놓은 과(過)는 공을 뒤덮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비대한 정부 자체가 반시장의 흉측한 상징물이다. 이제는 한국판 야케부토리의 막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 이것이 지난 대선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다.
노 대통령이 요즘 새 정부의 부처 통폐합과 공무원 수 감축계획을 앞장서 비판하는 모습은 보기에 안타깝다. 관객이 떠난 뒤에도 무대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주연배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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