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그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 입력 2008년 1월 31일 02시 58분


서울의 한 여교수는 얼마 전 고교 2학년인 자신의 아들에게 걸려온 휴대전화를 무심코 받았다가 깜짝 놀랐다. 발신자가 ‘마누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입력해 놓은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도 좀 지나치지 않으냐”고 했더니 아들은 “그보다 더 심한 표현도 있다”고 했다.

여학생 앞에 기죽는 요즘 남학생

여학생들의 애정 공세는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교사들의 전언이다. 과거에는 늑대 같은 사내 녀석들로부터 딸아이를 지켜내야 했으나 요즘은 반대로 여학생들의 적극적 애정 공세로부터 아들을 지켜내야 하게 됐다.

실제로 상급학교 진학 철만 되면 아들을 둔 부모는 여학생과 경쟁을 하지 않는 남자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고, 딸을 둔 부모는 만만한 남학생이 많은 남녀 공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대학의 수석 졸업생은 대부분 여학생 차지다. 언론사에도 여성의 진출이 괄목할 만큼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자를 능가하는 여성을 의미하는 ‘알파 걸(Alpha Girl)’이라는 용어가 부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10년 이상 진행되다 보니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대단히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역시 한국에서의 괄목할 만한 여성 파워 현상이다. 특히 여성이 자녀 양육과 교육 및 자산관리에 있어서 이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휘두르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얘기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는 1996년 36명(7.2%)에서 2006년에는 375명(37.7%)으로 10년간 크게 증가했다. 행정고시 여성 합격자도 1996년 19명(9.9%), 2006년 104명(44.6%), 2007년 123명(49%)으로 늘었다.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는 1996년 4명(9.8%), 2005년 10명(52.6%)으로 증가한 데 이어 2007년에는 무려 67.7%로 급등했다. 국내 대기업 3곳 중 한 곳은 대졸 신입사원 선발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을 압도해 ‘남성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다. 반면 아내 대신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 ‘전업 주부(主夫)’가 3년 새 42.5%나 늘어 15만 명에 이른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1세기에는 ‘여성 우위’를 넘어 사실상 ‘여성 독주’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미국 언론은 종전에는 유능한 아내 때문에 위축을 느끼는 사내를 ‘작은 남편(Small Husband)’,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아내를 둔 남자는 ‘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는 성공한 아내를 둔 소수의 남편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 전 등장한 ‘베타 남(Beta Male)’이라는 용어는 좀 더 적극이고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현대 남성상을 보여준다. 돈 잘 벌고 똑똑하지만 자기보다 우수한 여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알파 남’과는 달리, 수입과 학력이 떨어지지만 성공한 아내를 기꺼이 이해해 주는 남성이라는 의미다. ‘남녀 간 전쟁(Sex War)’에서 남성이 항복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던 조연이나 내조 역할을 남성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여성우위 넘어 여성독주 시대로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하는 한국 주부들의 유행어가 있다. ‘잘난 아들은 나라에 바치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에게 보내고, 못난 아들은 내가 돌본다’는 말이다. 바치고, 보내고, 돌보는 주체가 여성인 점에 주목하라. 한국 가정의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갔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경영학계의 3대 스승으로 꼽히는 톰 피터스는 아예 “경제성장 원동력은 중국이나 인도 인터넷이 아니라 바로 여성”이라고까지 말한다. 어느덧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한국 주부가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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