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화에 대한 우려는 한국 정치에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미 작년 대선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과 재합당을 거듭함에 따라 정당체제가 다극화되는 전조가 나타났다. 이제 4월 총선을 앞두고 그런 전조가 더 짙어진다. 이회창 총재는 자유선진당을 출범시켰고 문국현 대표는 창조한국당을 추스르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도 기정사실이 됐다.
다당제서는 책임정치 힘들어
대통합민주신당도 손학규 대표와 정동영 전 대선 후보가 언제까지 갈라서지 않고 함께 이끌어갈지 의문이다. 소위 친노 진영도 계속 무소속 단체로 남기보다는 언젠가는 정당세력화를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친이’ 대 ‘친박’ 진영으로 나뉘어 내홍과 불안한 봉합을 반복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만약 분열한다면 발칸화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탈당의 유혹을 느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기존 당에 머물러 봐야 본선 승리는커녕 공천도 받기 힘들다거나 비주류로 냉대를 받는다면 다른 당으로 가거나 새 당을 만드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정당이 공적 제도로 고착되지 못하고 몇몇 명망가가 이끄는 개인조직의 성격을 크게 벗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박차고 나가 새 판을 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국정 운영 관점에서 볼 때 분당으로 인한 정당체제의 다극화는 비극이다. 양당체제의 정당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중간지대를 향해 움직이는 것과 달리 다당체제에서 정당은 각각의 지지 기반을 굳히기 위해 주어진 이익을 외쳐 대고 고수하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둔다. 다양한 사회이익을 조율해야 할 정당이 특정 이익의 표출을 유일 목적으로 삼는 이익단체로 전락하는 셈이다. 이익단체끼리 놔둘 경우 상호 대화와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극적 정당끼리는 원만하게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정당 간 합종연횡이나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면 정치와 국정은 더 혼란스러워지며 예측성과 일관성을 기할 수 없게 된다. 이 속에서 책임정치도 구현되기 어렵다. 이익단체는 나름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정당마저 사실상 이익집단화한다면 파편화된 사회 이익을 종합 조정해 국정을 이끌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일이 힘들어진다.
개인적 동기로 탈당 유혹을 받는 정치인을 공익 관점에서 설득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정당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연대감을 강조해도 사회가 급변하고 이해관계가 파편화하는 후기산업시대에 별 효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탈당 전력자에게 표를 주지 말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더 공허하다. 그보다는 당 내부적으로 탈당과 분당의 명분을 주지 않는 방식이 좋아 보인다. 정당을 민주적으로 운영해 다양한 내부 목소리가 때론 부딪치고 때론 화합하도록 한다면 원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지 않아 불만스럽더라도 탈당과 분당을 감행하기 부담스러울 것이다. 반면 공천이나 당 운영을 획일적으로 한쪽 방향으로 밀어붙이려 할 때 내부 갈등이 흡수되지 못해 결국 외부로 터져 나가게 된다.
당내 갈등 민주적으로 처리를
미국 정당은 통일성이 낮아 내분을 겪는 때가 많지만 민주적 운영 덕에 탈당이 거의 없어 양당체제가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탈리아 정당은 통일성이 높지만 민주성이 낮아 내부 갈등이 곧 분당, 합당, 창당으로 이어지곤 하기 때문에 다극적 혼란함이 심하다. 발칸화 위기를 맞은 한국 정당 정치의 과제는 당연한 당 내부 갈등의 민주적 처리라 하겠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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