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성한]北-美‘오케스트라 외교’의 서곡

  • 입력 2008년 2월 11일 03시 00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1월 취임 직후 중국과 소련 사이에 흐르던 냉기류에 편승해 중국과 대화 채널을 만들어 소련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역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소련의 ‘독주’를 저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나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지자 분위기를 띄우는 도우미가 필요했다.

뉴욕필, 관계 개선 역할 할지 주목

마침 1971년 3월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 중이던 중국 대표팀이 미국팀을 ‘조용히’ 초청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4월 10일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하는 역사적인 ‘핑퐁 외교’가 시작됐다. 양국 탁구팀은 베이징에서 친선경기를 했고, 이는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과 그의 외교책사 헨리 키신저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으로 이어져 미중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현재 미국과 북한 간에는 ‘핑퐁 외교’ 대신 ‘오케스트라 외교’가 가동되고 있다. 26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을 한다. 미국과 북한 간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일치하기에 오케스트라 외교가 펼쳐지는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하고 직접대화를 거부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뒤이어 11월 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하자 대북정책을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 같은 ‘실용적 보수주의자’들이 대북정책의 변화를 주도했다. 그 결과물이 ‘2·13 합의’와 ‘10·3 합의’다. 북핵 문제를 폐쇄-불능화-폐기 단계로 나눠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북한의 합의 이행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고 북-미관계 개선조치를 취해 나가기로 했다.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 관계 정상화가 미국의 전략적 비전인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생각은 좀 달라 보인다. 비핵화보다는 대미관계 개선을 통한 중국 견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두 해 전 뉴욕을 방문한 북한 고위 관리가 미국 측 인사들에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북한을 활용하라”고 했다는데, 이는 마치 30여 년 전 미중관계가 대소련 견제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상화한 것을 연상시킨다.

문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는 리비아가 아니라, 핵을 갖고도 미국과 잘 지내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주시할 가능성이다. 인도처럼 중국을 견제할 테니 핵무기는 인정해 달라는 일종의 ‘사이비 인도 모델’을 북한이 추구하고 있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미국은 인도의 사례를 확산시킬 의사가 없고, 정작 북한이 본받아야 할 한국이 북한 핵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한국, 낭만주의로 바라봐선 안돼

우리가 뉴욕필의 평양 공연을 낭만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기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가 함께 갈 수 있도록 한미 공조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북한과의 협상을 너무 서두른 나머지 경제 지원, 관계 정상화, 평화 체제 등이 핵 폐기보다 먼저 이루어져 북한 핵을 사실상 인정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뉴욕필은 미국과 북한의 국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그리고 바그너의 낭만파 음악의 대표작 ‘로엔그린’을 연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파리 대신 ‘평양에 간 미국인’이 북한을 ‘신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얘기다. 다만 성배(聖杯)의 기사 ‘로엔그린’과 결혼한 브라반트의 왕녀 엘자가 결혼식날 금단의 질문을 던지는 실수를 저질러 로엔그린이 백조를 타고 성배가 있는 나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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