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불 타버린 숭례문, 후손에게 큰 죄 졌다

  • 입력 2008년 2월 11일 22시 59분


후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 날이 밝자 처참한 모습을 드러낸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앞에서 시민들은 말을 잃었다. 후대에 반드시 전해야 할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죄책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서울 도심을 호령하듯 웅장하고 빼어난 자태를 뽐냈던 1, 2층 누각 가운데 2층은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1층은 화재 여파로 언제 추가 붕괴될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다. 숭례문 주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매캐한 냄새에 다시 한 번 절망한다. 못난 우리들의 부주의로 후손들은 숭례문의 진정한 위용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숭례문은 조선조 태조 때인 1398년 완공되어 몇 번의 보수공사를 거치긴 했지만 600여 년의 긴 세월을 굳건히 견디어온 서울의 정문(正門)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같은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 선조들의 목숨을 건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재 防災시스템 새로 짜야

숭례문은 아름다움으로 치면 조선 초기의 견실한 장엄미(美)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역사성으로 보면 국내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우리는 훈민정음과 석굴암, 팔만대장경과 함께 세계인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문화유산을 허무하게 소실시키는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무엇보다 화재가 발생한 뒤 신고가 바로 이뤄지고 소방당국이 즉각 현장에 출동했는데도 소방인력이 무려 5시간을 우왕좌왕하다 문화재를 다 태우고만 게 어처구니없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숭례문은 소방인력과 장비의 접근이 쉬운 곳이어서 문화재청과 소방당국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외유 중이었다. 문화재 보호의 총사령관 격인 그는 문화재 보호보다는 훼손 전력으로 더 유명하다. 지난해 5월에는 경기 여주의 효종대왕릉 재실 앞에서 숯불버너 오찬을 주재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처럼 책임자부터 근무기강에 나사가 빠져 있었던 것도 비극적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소방방재청 측은 ‘문화재청이 문화재 파괴에 대한 우려를 내세워 화재 진압에 신중히 대처할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문화재청은 ‘화재 진압이 우선’이라는 뜻을 전했다며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다. 숭례문은 고작 소화기 8대에다 안전 인력도 낮에 3명이 배치될 뿐, 야간에는 무인경비시스템으로 운영돼 관리가 소홀했다. 화재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놓은 셈이다. 방화범 검거와 함께 진압과정에서 있었던 관계 당국의 잘못을 엄중 문책해야 한다.

목조 문화재 화재가 자꾸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문화재 보호의 책임을 얼마나 다하고 있는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최근만 해도 2005년 강원 양양 낙산사 화재로 보물 479호 동종이 소실됐고 2006년 창경궁 문정전 화재,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의 서장대 화재가 방화에 의해 일어났다. 언제 어디서 또 문화재가 소실될지 걱정이 앞선다. 문화재 방재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이 시급하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는데도 문화재에 대한 국민 인식은 그만큼 높지 않다. 참여정부가 지난 5년간 전국 곳곳에 지역균형 발전을 내세워 개발사업을 펴면서 숱한 문화유적이 파헤쳐졌는데도 문화재청은 오히려 사업면적 3만 m² 이상에 대해 문화재 발굴을 의무화하던 규정을 10만 m²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개발사업이 문화재 지표조사도 생략된 채 강행될 판이다. 정부의 문화재 보호의식이 높아져야 하고 국민 인식도 이런 성급한 논리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만큼 성숙해져야 한다.

역사성 살린 복원으로 속죄를

가뜩이나 문화계에서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문화정책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대통령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문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점과 대통령직인수위에 문화 전문가가 한 명도 없는 점이 구체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실감하듯이 문화적 가치는 돈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새 정부가 문화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경제와 문화를 조화시키는 정책을 펴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은 ‘5000년 문화민족’임을 자랑해 왔다. 문화재를 잘 보존해 후손에 넘기는 일은 문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숭례문을 최대한 역사성을 살려 복원하는 게 그나마 우리가 후손들에게 속죄하는 길이다. 숭례문 재건에 모두가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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