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대개 러시아 측 파트너로부터 의전상의 결례나 계약 불이행, 황당한 반칙 등을 겪어본 경험을 갖고 있다.
러시아인 스스로도 “우리끼리도 거짓말이 흔해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할 때가 많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지난달 러시아 관영통신 리아노보스티는 ‘러시아인의 허풍이 미국인이나 유럽인을 능가한다’는 미국발 조사 결과를 인터넷에 올렸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만난 러시아인들도 대개 이 조사 결과에 동감했다.
러시아인이 한 말을 토대로 사실을 확인하려는 언론도 종종 미궁에 빠지곤 한다.
지난해 러시아 일부 신문은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의 말을 인용해 “1992년 9월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KGB가 ‘심리 무기’로 막았다”고 보도했다. 옐친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땅이 된 쿠릴 열도를 반환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를 사전에 간파한 KGB 요원들이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서방 기자들은 “황당한 얘기”라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수 러시아 언론들은 이 뉴스를 진지하게 전했다.
물론 러시아 사회 전체가 거짓말과 불신만으로 둘러싸여 있지는 않다. 자본주의 진전에 따라 성실하게 돈을 벌고 정직한 생활을 하는 러시아인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생활을 체험한 외국인들은 여전히 “사회 내부에서 체감하는 불신의 정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심하다”고 말한다.
지난달 말 자동차 와이퍼를 교체하기 위해 모스크바 시내의 부품 판매점을 들른 한 일본인은 결국 제품 구매를 포기했다. 그는 “와이퍼 하나 교체하는 데 가게 카운터 여덟 군데를 들러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복잡한 판매 절차는 직원들의 상호 감시 장치 때문에 생겨났다. 부품을 팔고 돈을 받기까지 내부 직원들이 서로 확인하지 않으면 부품이나 돈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점포 주인의 생각이다.
옛 소련 시절 공장 물품을 ‘인민의 물건’으로 여기고 별다른 죄의식 없이 담장 밖으로 빼돌린 경험이 있는 러시아인 대다수는 이 같은 생각에 동의한다. 공산주의 원조 국가에서 뿌리박힌 내부의 불신은 사회의 독소로 작용한다. 가게 주인들은 상호 감시를 위해 직원을 늘려야 하고, 고객들에게서는 불편하다는 항의를 받는다.
모스크바 시내 공증사무실이나 등기소에서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사무실 안에서 문밖으로 이어진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가짜 서류 접수를 막기 위해 국가 기관이나 거래 상대방이 거주등록, 부동산거래, 자동차 운전 등에 필요한 서류에 공증 도장을 받아 오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증사무실 관계자가 장시간 줄서 기다리는 고객들에게 사실 관계를 캐물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흔히 벌어진다. 사회 내부의 불신이 거래 비용을 높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이런 러시아와 상대하면서 거짓을 가려내고 신뢰를 쌓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러시아식 진실 게임’에서 사태를 빠르게 파악할 지역 전문가, 러시아 정치인과 관료를 만나며 신뢰관계를 두텁게 만들 외교전문가, 신뢰와 불신의 경계에서 국익을 고려할 줄 아는 협상 전문가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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