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철희]한중일 공생외교시대 왔다

  • 입력 2008년 2월 15일 02시 59분


지난 주말 한국을 방문한 일본 초당파 의원들과 많은 토론을 했다. 일본 내의 비뚤어진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아시아 외교에 힘을 쏟는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아베 신조 시대를 ‘잃어버린 6년’이라고 자기성찰하면서, 새로 탄생하는 이명박 정권이 아시아외교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낼 건지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한 일본 의원은 보수정권이 탄생하면서 한국에만 오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사라졌다며 안도감을 내비쳤다. 새 대통령이 이끌 한국을 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떤 아시아 구상을 펼칠 것인지에 대해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일 양국 모두 정치지도자의 교체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이념외교로부터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실용외교로 전환하고 있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서로 감정을 앞세우며 자극적 대화의 교환을 진지한 대화로 착각했던, 아니면 대화의 거부가 대화의 방법이라고 여겼던 시대는 갔다. 일본 후쿠다 야스오 내각의 아시아 중시 외교와 중국의 신사고(新思考) 외교에 힘입어, 아시아 국가들이 ‘적대적인 공존’을 넘어 ‘협력적 공생’으로 전환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실용외교 분위기 무르익어

한국의 신정부도 협력과 연대의 추세에 힘을 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일본의 우익세력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과 외압을 가해 이들을 해체하려던 시도가 역으로 이들을 결집하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사 문제는 일본의 문제다. 일본이 자국 내 ‘리버럴’들의 힘의 결집을 통해 역사 문제에 스스로 대처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고, 동아시아 지도자들은 협력의 물꼬를 트자는 발상이다. 또 갈등보다는 협력을 바라는 동아시아 국가 내 집단 간 초국가적 연대를 구성해 협력 분위기를 강화해 나가자는 것이 지금의 추세다.

동아시아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자극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어른스러운 대응이 먼저 필요하다.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 그리고 민감한 곳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틀 일정을 요약했다. 한일 간의 국민 교류를 실감한 다른 일본 의원도 자국에 돌아가 우익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스스로 ‘방화벽’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정치인들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라는 말을 건넸다. 양국의 시민들만큼만 성숙해져도 갈등은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소극적 방식만으로 동아시아의 협력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일본 민주당의 한 의원이 지적했듯,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제까지 공통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보지 못했다. 적극적인 아시아시대의 개척은 지금부터다. 협력을 하자는 구호 선창이 아니라 무언가를 함께 만들고 있다는 ‘협력의 습관’이 연대감을 만들어 내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끌어 낸다. 함께할 수 있는 일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많아서 탈이다.

자원 에너지 환경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수두룩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질환, 범죄, 이민도 함께 풀어야 할 문제다. 또다시 경제 위기가 온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피해자일 터인지라, 금융 불안과 유동성 관리도 함께 신경을 써야 한다.

나아가 한중일은 공통의 고민거리가 많다. 경제가 글로벌화하면서 나타나는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 급격히 진전되는 인구의 고령화, 저출산, 국제화도 같이 안고 있는 숙제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직면한 공통의 고민에 대해 함께 지혜를 나눌 때가 됐다. 전쟁과 제국주의, 냉전과 같은 전통적 위협보다 소프트하지만 생활에 밀접한 도전이 동아시아를 급습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거대한 도전에 함께 대비해야 할 때는 온다. 아니 이미 다가와 있는지 모른다.

‘베세토 정상회의’ 주도해야

한국의 신정부는 소극적인 문제회피형 아시아외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동아시아시대를 열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 바란다. 베이징 서울 도쿄를 잇는 ‘베세토(BeSeTo) 정상회의’를 한국이 먼저 주도적으로 제안하면 어떨까. 정상회의와 더불어 한중일의 현인들로 구성된 비전그룹을 만들어 동아시아 공동비전을 설계한다면 더욱 좋겠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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