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병호]CIA가 보여 준 국정원의 살 길

  • 입력 2008년 2월 20일 03시 03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가정보원에 대한 개혁 작업이 강도 높게 다시 전개될 듯싶다. 누가 봐도 국정원의 현재 모습이 국민이 기대하는 수준에 영 못 미치기 때문이다. 그간 국정원에 대한 개혁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국정원의 지휘부가 바뀔 때마다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국정원 모습은 정보기관의 제 모습으로 변모하기는커녕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조차 헷갈리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기념식수 표지석 설치를 위해 평양 방문 소동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쩌다 국정원이 이런 처지까지 내몰린 것일까. 국정원만의 책임일까. 기본적으로 정보기관의 개혁은 하루아침에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나무를 키우는 것같이 오랜 기간에 걸친 일관된 프로세스를 통해서만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물론 일차적으로 해당 정보기관이 잘해야 한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성공 여부의 관건은 국가 정치 리더십이 쥐고 있다. 아무리 좋은 개혁 의지와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해도 정치지도자가 정보 아마추어를 책임자로 보내고 또 그것도 1, 2년이 멀다 하고 교체하면 그 개혁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다.

한 술 더 떠 정치지도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에 장단을 맞추도록 정보기관을 오용한다면 그 기관은 있으나마나 한 기관으로 전락한다. 지난 10년간 국정원 지휘부의 인사 패턴과 햇볕정책의 추진 과정을 보면 바로 이 ‘실패의 레시피’를 따라 국정원이 운영돼 왔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새 정부의 국정원 개혁이 성공하려면 이런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개혁을 위해 편제를 슬림화하고 3D 업무였던 대북업무를 복원한다고 한다. 과거 국정원 개혁이 시도될 때마다 들어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편제 조정을 시도하는 현 접근방법은 정권 초기에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구상 자체가 개혁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정치 리더십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개혁의 모멘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얼마 전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역임한 조지 테닛이 ‘폭풍의 중심에서(At the Center of the Storm)’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테닛은 자서전에서 국장으로 임명받은 당시 CIA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7년 동안 다섯 번째 부임하는 국장이었다. 이 정도로 잦은 지휘관의 교체로 조직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기란 불가능하다. 직원들은 피동적이 됐고, 냉전이 종식됐다는 시대 명분 때문에 직원의 25%가 줄었다. 직원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돼 있었다.’

테닛은 바로 강도 높은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초점은 국제 테러리즘에 대비한 역량 축적에 맞춰졌다. 그 결과 4년 후에 닥친 9·11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CIA는 국가 안위를 지켜 내는 데 중심 역할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게 된다. 테닛의 자서전에는 그 개혁의 과정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국정원 개혁의 목표는 바로 테닛이 묘사한 CIA와 같은 정보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일 게다. 이를 위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리더십 발휘를 기대해 본다. 정보기관은 원래 대통령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은 속성을 지녔다.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국가기능을 튼튼히 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이것이 이번 국정원 개혁이 반드시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다.

이병호 전 국가안전기획부 차장 울산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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