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방송위의 실패와 사람

  • 입력 2008년 2월 20일 03시 03분


김대중 정부에서 김정기 방송위원장이 취임한 지 6개월 됐을 때다. 실세로 통했던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돌연 ‘TV 선정성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수영복 몸매 등이 넘실대는 TV의 여름철 오락물을 보고 청와대에서 혀를 찼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박 장관의 선언은 방송위에 대한 ‘월권’이었다. 정책 행정권과 심의 규제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갓 출범한 방송위와 최소한 협의라도 했어야 했다.

방송위는 김 대통령이 자문기구로 둘 만큼 의욕을 보인 ‘방송개혁위원회’의 성과로 거듭난 기구다. 방개위 보고서 ‘방송 개혁의 방향과 과제’는 방송사 시민단체 노조 등이 3개월간 숙고해 합의한 것으로 방송 제도에 관해 이만한 보고서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고서는 첫 장에 방송의 독립성, 공익성, 방송 통신 융합 추세에 대한 능동적 대처를 천명했다.

이런 제도적 뒷받침을 받은 방송위는 박 장관의 한마디로 “권한이 커졌는데도 제구실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 방송위원은 “문화부도 방송 소관 부처가 아니냐”며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다. 김 위원장은 이후 정치권의 압력과 방송계의 이해 다툼 때문에 임기 1년을 남긴 채 사퇴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두 달 뒤 출범한 2기 노성대 위원장 때 ‘탄핵방송 공정성 심의 포기’는 방송위의 위상을 의심케 했다. 방송위에서 탄핵방송 분석을 의뢰받은 한국언론학회가 “불공정했다”고 결론 내자 정권과 지상파의 눈치를 본 방송위는 “심의 대상이 아니다”며 직무를 포기했다. 학회 보고서는 “방송저널리즘 분석의 기념비적 성과”라고 평가받았으나 방송위에서는 휴지가 됐다. 방송위는 다시 추락했다.

2006년 8월에 시작한 현(3기) 방송위도 특정 이념에 편향된 시민단체 등에 휘둘린 끝에 ‘지상파 봐 주기’와 ‘아마추어 행정’이라는 지적을 면하지 못했다. 방송발전 기금을 지원받는 아리랑TV가 공익 채널선정에서 제외되는 기현상이 초래되기도 했다.

방송위 7년의 행적이 이렇다. 대략 살펴봐도 법적 제도적 독립성을 인정받았다는 정책 행정 기구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이 ‘방송위 실패’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방송위의 한 간부는 “지금은 고인이 된 강원용 고병익 위원장(2000년 이전 방송위) 등이 운영할 때는 상식적 합리적 판단을 내렸고 그 권위에 모두 승복했다”며 “방송위의 정파성이 문제라고 하지만 위원들이 스스로 독립성을 차 버린 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진단은 요즘 방송통신위원회안을 둘러싼 위원 구성과 독립성 논란이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말해 준다. 대통령 직속 합의제 기구안의 취지는 ‘방송위 실패’를 거울삼아 행정 책임을 제대로 묻자는 것이다. 이를 보지 않고 독립성만 내세우는 주장은 사실상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것이다. 지난 7년간 ‘종이호랑이’가 된 방송위를 즐긴 이들이 과연 누구일까.

윤석민 서울대 교수는 최근 한 학회에서 “방통위 위원 구성은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다”며 “독립성 문제도 정치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면서 인격이 검증된 명망가 위원 구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방송(통)위의 문제는 이제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다. 방송의 독립성을 제도로만 보는 것은 ‘방송위 실패’를 외면하는 아마추어적 발상일 뿐이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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