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표절은 만약 사실이라면 범죄이고 의혹이라고 해도 수치다. 그러므로 같은 대학교수 처지에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마땅한 예의일 게다. 하지만 대학교수들을 이러한 불선(不善)의 덫에 자꾸 빠뜨리는 한 가지 제도적 맥락은 차제에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국내 교수사회에서 “연구 업적을 내지 못하면 도태된다(publish or perish)”는 논문평가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세계화 시대와 지식기반 사회를 맞이하여 우리나라 대학과 정부 당국이 학문의 수준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뒤늦게나마 함께 애쓴 결과다. 이로써 교수사회의 ‘철밥통’ 시대는 점차 옛말이 되고 있다.
논문 숫자로 교수평가 표절 불러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방법이다. 현재 시행 중인 교수업적 평가는 단연 논문 발표 중심이다. 어떤 학술지에 실렸는가도 중요하지만 대개는 일단 숫자부터 채워야 한다. 또한 그것은 연봉이나 승진 등과 관련하여 연(年) 단위로 체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대학 교직은 일년초(一年草)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대학이 시나브로 논문공장처럼 되어 가는 가운데 대학교수는 차츰 논문기술자와 흡사해지고 있다. 오랫동안 평가 무풍지대에 안주하던 우리나라 대학의 혹독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 아닐 수 없다.
대학교수의 업적평가 강화는 너무나 필요하고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것 나름의 성과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의 연구업적이 양적으로 측정하거나 비교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진다는 점은 아무리 배려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울러 학문 분야별로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는 필생의 역작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최대한 고려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연간 논문 생산량이 교수업적을 따지는 대표적 잣대인 경우, 표절 행위를 통한 유사품이나 불량품의 증가 현상은 일부 개인의 도덕적 일탈을 넘어서는 일종의 사회적 병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사회의 논문 중독은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더 심각한 병폐를 낳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문 자체의 조락과 황폐화다. 임용과 진급 혹은 연구비를 의식한 의무화된 글쓰기와 억지춘향식 문제 제기, 서론에서 본론을 거쳐 결론으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의 기계적 구성은 무릇 학문 본래의 창조성과 상상력 및 미학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게다가 요즘에는 파워 포인트 몇 장면이 지식을 압축하고 편집하는 추세다. 학술논문의 이름으로 매년 수천, 수만 개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것은 사회나 문화에 대해, 심지어 자신의 삶에 대해서조차 불임(不姙)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가령 세계 11대 출판대국을 자부하는 나라이지만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우리말 학술도서나 교양서적은 전혀 그 수준이 아니다. 작년의 경우 아동도서가 출판시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외국서적 번역이 전체 출판 종수(種數)의 25%를 차지했고 특히 베스트셀러의 경우는 절반을 넘어섰다고 한다. 지금처럼 논문지상주의 학문 풍조가 지속되는 한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이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할 것이고 막스 베버 같은 세기적(世紀的) 석학도 국내 대학에서는 교수자리를 벌써 잃고 말았을 것이다.
좋은 책도 낼수있게 제도 바꿔야
구미 선진 국가들은 교수연구 업적을 엄격히 관리하면서도 결코 논문 위주의 정량적 평가에 편중하지 않는다. 학문세계의 총체적 발전과 문화적 균형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업적이 없을 때 도태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연구에 게으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일 뿐, 연구에 부지런한 사람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방안이 사실은 더 많다. 우리처럼 논문 쓰느라 책 못 내는 난센스가 벌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 논문 표절 시비 문제를 차제에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검토해 보자.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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