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전부다. 일본에 뭔가 요구를 하긴 했는데, ‘독한’ 주문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도 변해야 한다고 우리까지 물고 들어갔다. 왠지 허전하다.
허전한, 그러나 분명한 對日메시지
미래지향적 대통령이라 할 말을 삼켰나. 다른 대통령들은 똑 부러지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역대 대통령의 첫 3·1절 기념사를 찾아봤다. 그런데 아주 의외였다. 허전한 듯한 이 대통령의 발언이 첫 3·1절 기념사 중에서는 그나마 일본을 향해 가장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한 발언이라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1993년 기념사에는 아예 ‘일본’이란 단어가 없었다. 객관적 사실로서 ‘일제’라는 말만 딱 한 번 사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98년 기념사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라는 단어를 한 차례 쓰긴 했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 와중에서’라는 대목에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3년 기념사도 일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세 대통령 모두 일본에는 어떤 주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범한 듯한 3·1절 기념사였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갔다. 역대 대통령 모두 마음속으로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꿈꿨는지 모르지만 원치 않은 시기에, 원치 않은 문제들이 튀어나와 양국관계를 경색시킨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바람에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 때문인지 요즘 일본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크다. 예측 가능한 대통령이 나왔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덕분에 ‘음치’ 뒤에 노래를 부르는 행운까지 얻은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이 아니다. 양국이 앞으로 이런 분위기를 살려나갈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양국이 정말로 관계 개선이나 선린 우호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지켜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여러 번 강조됐지만 실현되지 못한 것들이다.
첫째,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다고 해서 협상이나 교류까지도 중단하는 포퓰리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역사교과서와 독도 문제가 불거지자 우리는 청소년과 지자체 교류를 중단했다. 그 후 상황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슬그머니 교류를 재개했다. 채널을 열어두고 말싸움을 하는 게 차라리 유익하다.
둘째, 양국 모두 내셔널리즘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양국의 감정적 대응은 상대방을 자극해서 상황을 더욱 나쁜 쪽으로 증폭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이제 그런 고리는 과감하게 끊어내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은 배울 만큼 배웠다.
셋째, 외교관이나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도자가 국민의 아우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우성이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해법을 내놓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그러려면 문제를 좀 더 냉정한 시각에서 보는 외교관이나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를 내도록 해주고, 좋은 의견은 수용해야 한다.
이젠 한일문제도 다자틀로 풀어야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일본의 ‘한국 워처’들의 한국 방문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분위기를 탐색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한국의 정·관·학계 인사들을 만나 묻고, 묻고, 또 묻는다. 그들의 질문에서 예전과 다른 두 가지 변화가 감지된다. 하나는 한일관계를 양자관계가 아닌 국제적 역학관계에서 파악하려는 시각이고, 또 하나는 북한문제, 특히 일본인 납치문제에 한일관계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실용’이니 ‘미래지향’이니 하는 말이 허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가이드라인조차 없이 허겁지겁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런 가이드라인을 얼마나 일관되게 지켜나가면서 성과를 내느냐 하는 것이다. 5년은 결코 길지 않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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