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화성]한 호흡 한 걸음… 봄날은 간다

  • 입력 2008년 3월 18일 02시 58분


매화 꽃망울이 탱탱 불었다. 거리엔 에너지가 가득하다. 사람들은 힘이 용솟음친다. 서울의 봄은 사람들의 발바닥으로부터 온다.

케냐 마라토너들은 몸이 길쭉하다. 얼굴도 갸름하다. 하나같이 모딜리아니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을 빼닮았다. 다리는 두루미처럼 가늘고 길다. 몸은 마른 북어마냥 깡말랐다.

하지만 이들의 엉덩이는 빵빵하다. 허벅지 뒤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부분이 늘씬하고 팽팽하다. 이 ‘빵빵한 엉덩이’에서 순간적인 힘이 분출된다. 학자들은 이 부분을 ‘파워 존’이라고 부른다. 보통 흑인들의 ‘파워 존’은 백인이나 동양인에 비해 훨씬 잘 발달돼 있다.

16일 열린 2008 서울국제마라톤대회도 역시 케냐 선수들이 1위에서 6위까지 휩쓸었다. 스피드가 문제였다. ‘봉달이’ 이봉주(38·167cm)로선 아쉽지만 역부족이었다.

우승자 새미 코리르(37·178cm)는 성큼성큼 달렸다. 봉달이는 또박또박 뛰었다. 언뜻 보기에도 봉달이의 보폭이 10cm 이상 좁았다. 코리르가 쓰∼윽 쓱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면, 봉달이는 푸욱∼ 푹 바람에 발이 빠지거나 엉겼다. 초반부터 몸에 힘이 들어가 힘겨워 보였다. 코리르는 올 1월 두바이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1초(3위)를 기록했다. 봉달이는 지난해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초로 우승했다. 코리르는 공식 대회를 24번 뛰었고, 봉달이는 37번을 완주했다.

인간의 신체능력은 25세를 정점으로 매년 약 1%씩 떨어진다. 봉달이가 지난해와 똑같이 달렸다고 하더라도 약 1분 17초(2시간 9분 21초) 늦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코리르는 2시간 9분 18초 정도가 나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봉달이는 자신의 신체 가능기록보다 무려 3분 6초(2시간 12분 27초) 늦었다. 반면 코리르는 1분 46초(2시간 7분 32초)나 앞당겼다. 그것도 불과 두 달 전 풀코스를 완주한 몸으로였다.

결국 자신의 페이스를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의 차이였다. 봉달이는 3단이나 4단 기어로 꾸준히 달렸어야 했다. 초반 4, 5단 기어는 ‘엔진 과열’이었다. 코리르는 평소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4단 기어로 달렸다. 그게 그의 몸에 맞는 스피드였다.

인간이 달리며 숨 쉴 때 드나드는 공기의 속도는 시속 20km 안팎이다. 이 속도로 달려야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한 숨 빨리 내쉬거나 들이마시면, 금세 발걸음이 흐트러진다.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것은 결국 볏짚 한 가닥이다. 마라톤도 한 호흡에 달려 있다.

마라톤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경기장 안에서 이뤄지는 ‘트랙게임’이다. 요즘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의 승부는 대부분 결승선을 200∼300m 앞두고 시작된다. 피가 마른다. 지난해 봉달이와 2위 폴 키프로프 키루이의 거리는 137m(25초). 올 1위 코리르와 2위 제이슨 음보테는 약 27m(5초). 3위 에드윈 코멘과는 약 72m(13초). 적어도 케냐 선수들과 41km 지점까지 나란히 달릴 수 없다면, 우승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400m에서 승부가 결정된다. 마른 수건에서 최후의 땀 한 방울을 짜내는 자가 이긴다.

마라톤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것이다. 머리카락에 한 땀 한 땀 글을 새기는 운동이다. 날숨 들숨 끊임없이 단순 반복되는 고통의 호흡이다.

마라톤은 발로 쓰는 시다. 길에서 쓰는 시다. 움직여야 시가 나온다. 그것은 동사다. 울부짖음이다. 굿이다. 봄이 참 달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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