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평양의 차이
비교해봐야 할 다른 장면이 있다. 19일 제주 한라체육관에 북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울려 퍼졌다. 레슬링 아시아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66kg급에서 북한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우리는 관례에 따라 우승국 국기와 국가로 예우한 것이다. 체육관을 메운 시민들은 아낌없는 박수로 북한 선수의 승리를 축하했다.
‘남한은 북한의 국가와 국기를 수용하지만 북한은 남한의 상징을 거부한다.’ 스포츠 행사에서 확인된 실상이지만 현재의 남북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해 10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평양으로 가기 위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대(對)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남한 대통령이 걸어서 넘은 뒤 군사분계선은 어떻게 변했을까. 다음 달 27일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80명의 주자에 의해 서울 시내를 누빈 뒤 특별 전세기에 실려 평양으로 옮겨진다. 육로로 이동하는 방안이 논의됐으나 북한의 거부로 성화는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한다. 노 전 대통령의 군사분계선 월경(越境) 행사가 한바탕 쇼가 아니었다면 북한이 평화와 화해의 상징인 올림픽 성화에 길을 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이번 올림픽 개최국은 북한으로서는 적극 지원할 수밖에 없는 중국이다. 북은 남한 지도자의 군사분계선 도보 월경에 1회용 행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남북 관계가 심각하게 꼬인 것은 ‘비정상적 거래’에서 비롯됐다. 한 체육계 인사는 “북한에 금전적 보상을 해주지 않고 성사된 남북 체육교류는 단 한 차례도 없다”고 단언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엔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 급급했다. 남한이 ‘양보 모드’로 바뀌자 북한의 요구는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공동 행사를 위한 선수단복을 처음에는 대·중·소로 대별해 만들어줘도 감지덕지하던 북한이 “신체치수를 보내니 정교하게 만들어라” “고급 천을 쓰고 구두도 보내라”며 점점 낯이 두꺼워졌다. 남북교류 명목으로 북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주었는지는 2003년 제주 민족평화축전에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북한 대표단은 남한이 100만 달러의 현금과 120만 달러어치 현물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공항에서 7시간 동안 항의농성을 했다.
무시 당하는 돈주머니
비정상적 체육교류는 남북관계를 왜곡시켰다. 북한은 남한을 ‘돈주머니’로 취급할 뿐 존중할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됐다. 그런데도 남한은 자꾸 만나고 도와주면 북한이 변할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매달려 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남긴 부(負)의 유산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북한은 남한의 새 대통령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남한 새 정부와 전향적으로 무언가 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태극기와 애국가 거부를 읽어야 한다. 새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을 바란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북한 환상 깨기다. 그런 뒤 북한에도 합당한 대우를 요구해야 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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