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전철요금, 라면 등이야 서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자가용 승용차 연료인 휘발유를 생필품으로 분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에너지 관련 지출이 가계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10%를 넘고 특히 소득계층 하위 20% 가계의 광열비, 교통비 지출 비중은 14.9%에 달해 휘발유의 생필품 분류는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휘발유 소비는 생필품과 사치재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출퇴근용 소형 승용차 연료로서의 휘발유와 레저용 대형 승용차 연료로서의 휘발유는 분명 구분돼야 한다.
이 같은 휘발유 소비의 양면성을 무시한 일률적인 휘발유값 인상 억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에너지, 환경 정책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대형 승용차를 이용하는 고소득층에 집중되는 소득분배의 역진성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절약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온실가스 배출 억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현안이다. 그러면 이들 정책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가체계는 없을까? 전기요금 체제와 같은 누진제가 해답이 될 수 있다. 생필품 성격이 있는 기본 소비량까지는 저렴한 기본가격을 적용하지만 사치재적 성격이 있는 과소비량 부분에 대해서는 할증가격을 적용하는 누진제를 시행하는 것이다. 고소득층에는 소비절약을 유도하는 동시에 서민가계의 부담은 완화할 수 있다.
문제는 누적소비량의 측정과 가격 적용이다. 분명 아무데서나 주유가 가능한 수송연료의 누적소비량을 측정하는 문제는 소비지가 고정된 전기와 달리 매우 까다로운 문제다. 차량별 주유카드 발급 같은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또 가격 적용은 평상시 주유 단계에서는 할증가격을 적용한 뒤 연말 소득세 신고 때 정산할 수도 있다.
누진가격제는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효과도 있다. 가령 기본소비량을 연간 500L로 정하고 기본소비량까지는 유류세 완전 면제, 초과량에 대해서는 현행 유류세 적용과 같은 누진제를 고려할 수 있다. 이 같은 누진제가 시행된다면 연간 4000L를 쓰는 차량에는 4% 정도의 유가 인하 효과가 기대되지만 1000L를 사용하는 차량에는 약 17%의 인하 효과가 기대돼 일률적 가격 인하에 따른 소득 분배의 역진성을 제거할 수 있다.
최근의 유가 상승은 중국 등이 주도하는 수요 증가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구조적 수급 불균형이 주원인이다. 따라서 할당 관세 인하, 유통체계 개선 등의 방법만으로는 서민가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정도의 유가 안정은 어렵다. 서민가계 보호가 정책 목표라면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저유가만이 능사가 아니다. 에너지 빈국인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에너지절약형 경제시스템은 고유가(고에너지 가격) 신호에 의해 유도되는 시스템이다.
고유가 정책을 유지한 일본이 세계 최고의 에너지절약기술국이 된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