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병훈]희화화된 민주주의

  • 입력 2008년 3월 31일 03시 00분


부탄은 히말라야산맥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다. 인구가 60만 명밖에 안 되는 이 ‘은둔의 왕국’이 최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다. 100년간 이어 온 절대 왕정을 끝내고 민주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총선을 며칠 전에 치렀기 때문이다. 국내의 한 신문도 ‘민주주의로 전환하려는 부탄 국왕과 국민의 노력이 소중한 열매 맺기’를 축원했다.

그러나 부탄의 변신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민주주의에로의 여정(旅程)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설픈 민주주의를 하느니 차라리 왕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는 한탄이 나올까 지레 걱정이다. 미국의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는 “민주주의의 자살”을 염려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경계한 바 있다. 그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렇다. 18대 총선에 나선 후보자들은 목이 터져라 지지를 호소하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못해 분노에 가깝다. ‘이런 웃기는 선거는 처음!’이라는 말이 도처에서 들린다. 민심이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조마조마하기까지 하다.

이번 총선에는 역대 최다인 17개의 정당이 나서고 있다. 그 대다수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정당이 날림이다 보니 정책 대결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그저 ‘복당, 해당’ 하면서 내부 싸움에만 골몰해 있다.

국민 안중에 없이 정적제거 몰두

이번 선거가 역대 최고의 코미디 총선이 되고 말 것임은 각 당의 공천 과정에서 이미 확인됐다. 모두가 ‘물갈이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속셈은 정적(政敵) 자르기에 가까웠다. 유권자의 심판을 거친 현역 의원을 죄인 취급하고, 중진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안기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요, 자기부정의 극단이 아닐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의 존재가 안중에도 없다는 데 있다. 그나마 싹이 돋고 있던 상향식 공천의 전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권자들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할 판이다. 급조된 후보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낙하산 공천으로 뛰어들기가 멋쩍었던 듯 어느 후보는 ‘지역에 뼈를 묻겠다’고 다짐한다.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그 마음이 변치 않을지 두고 볼 일이다.

국회의원이 유권자의 대리인인지, 아니면 대표자이어야 하는지 학설이 분분하다. 대리인이라면 유권자의 뜻을 단순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때로 그 뜻을 거스르더라도 유권자에게 진정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대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국회의원의 역할이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권자로서는 생명과 안전, 재산 등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후보자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선택해야 할 권리가 있다. 이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정당도 아니다. 이런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한국의 각 정당은 유권자들에게 불량 선택지를 던져 주며 그중에서 하나를 고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오만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각국을 막론하고 정당의 위상이 갈수록 약화되는 시점이다. 서유럽 정당의 경우, 1960년대는 국민의 15%가 당원이었지만 지금은 5%도 채 안 된다. 두 눈을 부릅떠도 시원치 않을 형국인데 한국 정당들은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라도 있다’는데, 얼마나 더 바닥을 쳐야 정신을 차릴까.

정당정치 바닥으로 추락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이 유권자를 향해 너나없이 넙죽넙죽 큰절을 해댄다. 모르긴 해도 큰절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문밖에서는 더구나 삼가야 할 일이다. 언필칭 유권자를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약속의 표시일 텐데, 그런 행동에 감동할 국민이 몇이나 될까.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유권자들이 투표일에만 자유로울 뿐이라고 질타했다. 장장 250년 전의 일이다.

장관 시절에 국회의원들의 질의를 지켜보면서 ‘코미디야, 코미디!’라는 ‘절창’을 남겼던 어느 여류 정치인도 지금 열심히 춤추며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판 블랙 코미디를 보는 그의 속마음은 어떤지 궁금하기만 하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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