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미국산 쇠고기의 기억

  • 입력 2008년 5월 9일 02시 59분


서울의 유명 음식점인 우래옥의 미국 워싱턴점은 감칠맛 나는 음식으로 현지에서도 인기가 높다. 특히 갈비와 불고기의 맛과 육질이 뛰어나고, 냉면 역시 일품이어서 미국인들도 즐겨 찾는다. 이 집은 ‘좋은 재료가 맛의 비결’이라고 강조하지만 한우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미국산 쇠고기와 쇠뼈로 그윽한 ‘한국의 맛’을 빚어낸다.

뉴욕 맨해튼의 설렁탕집 감미옥은 침샘을 자극하는 진한 국물 맛으로 역시 많은 단골을 사로잡고 있다. 한우 사골을 푹 고아 우려내는 게 비결일까? 어느 나라 쇠뼈를 쓰느냐는 본보 뉴욕특파원의 문의에 이 음식점은 “당연히 미국 쇠뼈”라고 밝혔다.

워싱턴 우래옥 지배인은 “전직 대통령들을 포함해 미국에 온 한국 정치인들 중 우리 가게에 들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자부심을 나타내면서 “미국산 쇠고기를 문제 삼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본보에 밝혔다. 기자도 워싱턴 특파원 시절 그곳에서 한국의 여야 정치인, 고위공직자, 기업인 등과 여러 번 식사했지만 미국산 쇠고기를 찜찜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기자는 당시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안내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분들 중엔 미국에 온 김에 정통 스테이크와 햄버거를 맛볼 수 있게 좋은 레스토랑을 알려 달라거나 워싱턴에서도 ‘LA갈비’를 살 수 있는지를 묻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에 호기심을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기자는 때로 주말엔 동료 특파원 가족들을 집에 초대해 미국산 쇠고기를 굽고, 집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깻잎 등을 내서 한국식으로 쌈을 싸먹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산 쇠고기의 맛과 가격 경쟁력으로 볼 때 수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한국의 축산농민들이 큰 타격을 입을 것 같다는 걱정 어린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광우병을 우려하진 않았다.

요즘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 예전에 먹었던 미국산 쇠고기가 정말 그렇게 위험한 것이었는지 돌이켜보았다. 기자가 혹시 무지해서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행동을 한 건 아니었을까.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을 살펴보면 국민의 불안한 심정이 이해가 간다. 사전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타결을 서두르느라 검역주권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고, 민심이 흔들리는데도 사태를 안일하게 판단해 늑장 대처했다는 등의 따가운 비판에 정부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부가 한미관계를 화끈하게 풀어보려다 오버한 셈이다. 재협상이 쉽지 않아 고민이 크겠지만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보완책을 시급히 강구하는 게 옳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만을 놓고 본다면 인터넷 등에서 난무하는 의혹들은 지나치게 과장됐거나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게 대부분이다. 무책임한 ‘카더라’ 식 주장이 검증 없이 증폭, 확산되면서 ‘미국산 쇠고기=광우병’이라는 비이성적인 괴담과 어처구니없는 혼란을 낳고 있다. 선진국 진입을 바라보는 국가로선 참 부끄러운 일이다.

기자는 건강 문제에 많은 신경을 쓰는 편이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 보면 온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워야 할 만큼 광우병이 현실화된 위협은 결코 아니다. 한우농가에 미안해서라면 몰라도 불필요한 광우병 공포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를 일부러 피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한기흥 국제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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