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수난과 고통의 세대에 대한 예의

  • 입력 2008년 5월 12일 03시 01분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절감하는 것이 한국 사람으로 193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나는 얼마나 시운이 좋은가 하는 점이다. 두 세대쯤 앞에 태어나 지금까지 정도의 ‘출세’를 하며 살아왔더라면 지금쯤 아마 나도 친일인사 명단에 올라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름 없는 백성이었다면 징용, 징병, 또는 일본군위안부로 징발되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2, 3년만 앞서 태어나 중학교 때 반장 노릇을 했어도 6·25전쟁 초기 공산당 치하 3개월을 서울에서 지낸 후에는 공산당과 협조했다는 비난에 휘말리며 최소한 다른 학교로 옮겨가기라도 하는 곤경을 치렀을 것이다. 반장으로 공산당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던 4년 선배는 학교 동산 청량대에서 총살을 당했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때도 우리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모면하며 공부에만 전념할 수가 있었고, 온갖 난관 속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데 성공한 선대들 덕분에 정치적 경제적 발전의 효과는 고스란히 누렸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일제 탄압과 빈궁, 그리고 6·25전쟁의 악몽을 견뎌내며 아이들 6, 7남매씩을 길러 내신 우리 선대들의 고충, 망국의 충격과 심리적 현실적 고통 속에서 삶을 지탱해 나가야 했던 그 앞선 세대의 수난과 고통을 생각하면 나는 70평생을 ‘공짜’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대상황 고려 안한 ‘친일’ 못박기

‘친일인명사전’이라는 것이 10년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8월 드디어 3권의 책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기쁨보다는 서글픔, 심지어 죄스러움과 분노마저 느끼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세대의 고통스러운 투쟁에 대한 우리 세대의 예의와 보답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8월로 대한민국은 건국 60주년을 맞는다. 그래서 얼핏 보면 친일파 청산 작업의 총결산이라는 이 사전 발간은 애국선열에 대한 가장 고귀한 보답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과연 그분들이 그처럼 갈망하던 독립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친일파’로 못 박으며 나라를 갈라놓는 듯한 일을 좋게 보실까. 망국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집안의 일시적 몰락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우리 외조부를 떠올려 보면 그분은 결코 이 일을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어떤 외국인이 우리를 민족주의자(nationalist)이기는 하나 애국자(patriot)는 아니라고 지적한 말이 생각난다.

친일 문제를 깊이 연구해온 분들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친일 행각은 그 후의 업적이 어떠했건 밝혀져야 하며 친일적 처신으로 민족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나치 전범들을 몇십 년 후 멀리 남미로까지 추적해 처단하는 모습에 나도 박수를 보냈다.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간 북한과 이념적으로 대치하며 나라를 세우고 지켜가야 했던 상황 때문에 친일 청산 작업을 철저히 못한 점이 이승만 정부의 오점으로 남게 된 것도 사실이며 항일투사나 그들의 후손에 대한 인정과 보상이 매우 미흡했다는 것도 우리 사회 전체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일제강점기를 살던 세대에게는 이름을 갖고 살아남는 일 자체가 투쟁이요, 치욕이었다는 점이다. 개인의 이름을 더럽히더라도 학교나 교회를 살리는 것이 보다 밝은 민족의 미래를 기약하는 첩경이요, 좀 더 타협을 해서라도 신문이나 사업을 살리는 것이 완전히 폐간이나 몰수당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항일과 반일 감정에서 누구도 추종할 사람이 없었던 이승만 박사는 그 점도 이해한 것이다.

친일보다 항일활동에 역점둬야

애국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변절할 때 느끼는 실망과 분노는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지탄하기보다 더 중요하게 우리가 밝혀야 할 것이 일제의 압력과 회유가 어느 정도였으면 거목들까지 쓰러졌을까 하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행적을 소상히 밝히는 일과 친일파인지 아닌지를 재단해 못 박는 일은 서로 다른 차원의 일이 아닌가 한다. 민족문화 연구의 업적이 길이 남으려면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친일인명사전’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인명사전’으로 확대 개편해 친일보다 항일 활동에 더 역점을 두고 인명사전을 내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인호 KAIST 김보정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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