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세까지 상업 탄압-천시
우리의 사정은 대조적이다. 가장 오래됐다는 두산이 112년이다. 다시 말해 고종 황제 전에는 제대로 된 기업이 없었다. 그러니 무슨 힘으로 일본을 당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에게 기업이 없었던 이유가 뭘까. 이 보고서를 읽다 보면 우리가 일본인보다 장인정신이 모자라고 신뢰를 가볍게 여기며, 외적의 침입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상업을 천시하고 탄압하던 우리의 사고방식과 제도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곤고구미를 세우고 1400년 넘게 유지해 온 것은 바로 백제인들이다. 금강(錦江) 유역에 살던 세 명의 백제인이 쇼토쿠 태자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錦江’의 일본식 표기인 ‘金剛’을 이름삼아 기업을 창업한다. 안타깝게도 2006년 자금난으로 다카마쓰에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1428년 동안 경영권을 이어온 사람들은 분명 충청도 백제인의 혈통이다.
왜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니라 일본에 가서야 기업을 만들었을까. 장인정신이 없어서? 그보다는 왜 똑같은 사람이 일본에 가서야 장인정신이 더 생겼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1778년)가 의문을 풀어준다. “시장에서 물건을 매매하거나 자와 먹통, 칼과 끌을 갖고 남의 집에 품팔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우습게 여겨 혼인길마저 끊어진 사람이 많다.” 우리의 상업 천시 풍조를 개탄하며 쓴 글이다. 이 땅에서 기업 활동은 그처럼 천시됐다. 자식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제도적으로도 조선의 공식 정책은 억말(抑末), 즉 상업 탄압정책이었다. 금난전권은 폭력으로 민간기업을 파괴하는 도구였다. 조선 전에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우리 민족성이 기업 활동에 맞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탄압하고, 천시하고,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우리의 기업 역사가 일천했던 것이다.
외적의 침입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마지막 대규모의 외침은 1636년의 병자호란이었다. 그 후 한일강제합방까지 약 270년간 외침이 없었음에도 이 땅에는 어떠한 장수 기업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미쓰코시(1673년)와 스미토모(1691년)가, 미국에서는 듀폰(1802년)과 제너럴일렉트릭(1890년)이 일어나서 커가던 시기다.
물려줄 수 있어야 장수기업 나와
물론 이 땅에도 기업의 싹이 튼 적은 있었다. 박제가 등과 ‘코드’가 맞은 정조는 신해통공(1791년)으로 자유기업주의의 빗장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약간만 열었는데도 기업 활동이 시작됐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펴졌다. 최인호의 소설로 다시 태어난 조선 유일의 거상 임상옥(1779∼1855)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정조 사후 세상은 다시 선비와 정치만이 판치게 됐고, 겨우 싹을 틔우기 시작한 사업가들은 철퇴를 맞는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돈 버는 일이 인정받게도 됐고,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일로 바뀌기도 했다. 물려주는 것이 인정되기만 한다면 앞으로 100년 뒤에는 이 땅에도 200년 된 기업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업 상속을 용인할 만큼 ‘가진 자’들을 인정하고 있는가. 1430년 된 곤고구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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