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대회에서 지구촌을 뒤흔든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으로 상징되는 응원 열기는 한국적 집회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민족을 결집시킨 월드컵 열기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 미선이의 꽃다운 삶을 추모하는 모임에서 촛불시위로 연결된다. 사건의 특성상 반미 구호가 난무하고 미대사관으로 향하는 ‘이동하는 집회’를 감행했어도 관용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둠이 찾아든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촛불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파장은 모든 참여자의 마음을 업(up)시키기 마련이다. ‘뇌 송송, 구멍 탁.’ 온 나라가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에 들끓는 와중에 진행되는 촛불집회는 촛불문화제로 치환되고 있다. 어둠을 뚫는 촛불집회는 불법적이지만 촛불문화제는 합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와 폭력적 행동이 난무하던 지난날의 촛불시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만큼 민주시민의식이 성숙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순한 책동에 선량한 시민들이 동조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위험이 상존한다. 민주시민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말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권국가 시민으로 검역주권을 지키려는 의지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교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촛불문화제를 마냥 지켜만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긴 여적을 남긴다.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을 어린 학생들이 걱정하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걸린다.
민주국가에서 집회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 집회의 자유는 집단적 표현의 자유로서 대의제도를 보완하는 기능을 가진다. 시위도 장소 이동적인 집회로서 보장된다. 하지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정한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옥내집회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주간 옥외집회나 시위도 신고만 하면 널리 허용된다. 하지만 야간의 옥외집회나 시위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아니한다. ‘다만, 집회의 성격상 부득이하여 주최자가 질서유지인을 두고 미리 신고한 경우에는 관할 경찰관서장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허용할 수 있다(제10조). 이 경우에도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및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에는’ 적용하지 아니한다(제15조). 하지만 오늘의 촛불집회가 집시법의 적용이 배제되는 문화행사라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마녀사냥식 범법자로 몰고 가서도 안 되겠지만 적법성 여부는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차제에 시위문화도 개선돼야 한다. 민주화를 주창하던 시대의 초법적인 구국적 시위와는 구별돼야 한다. 근래 외국에까지 나가는 원정시위도 일상적이다. 워싱턴 DC에서 펼친 시위에서는 미국 경찰당국과의 약속을 엄격하게 지켰다. 하지만 홍콩에서의 시위는 정반대였다. 결국 사법처리 문제까지 야기했다. 여기에 우리 시위대의 이중적 인식이 드러난다.
집회와 시위에 대한 정부당국의 일관성 없는 법 적용의 잣대가 법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킨다. 집회와 시위는 정당하고 법에 따라 이를 제지하는 공권력은 부당하다는 선입견도 거두어들일 때가 됐다. 이제 우리도 헌법과 집시법이 정한 원칙대로 법을 집행함으로써 정당성에 기초한 공권력의 적법성을 확보해야 한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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