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돈 되는 전공

  • 입력 2008년 5월 20일 02시 57분


한국에서 교수가 되려면 의학이나 법학을 전공해야 할 것 같다. 동아일보가 2004년 3월 이후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한양대 중앙대 경희대 이화여대 등 9개 대학 본교에 채용된 교수 3168명의 전공을 분석했더니 4명 중 1명꼴로 의학이었고 그 다음이 법학 경영학 순이었다. 인문계의 역사 철학이나 자연계의 물리 화학 등 기초학문 전공자를 채용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속된 말로 ‘돈 되는’ 학문 전공자들만 집중 채용한 것이다.

▷대학들이 앞 다퉈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인가를 신청할 때 예견된 일이기는 하다. 일정 수준의 교수를 확보해야만 인가를 받을 수 있어서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로스쿨 인가를 신청한 대학들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요구한 교수 학생 비율 1 대 12를 충족하기 위해 법원과 로펌에서 전문가들을 모셔오기도 했다. 게다가 학생의 과목 선택폭을 넓힌 학부제 실시로 비인기 과목 강좌가 사라지고, 학생들도 취업난 때문에 실용학문을 선호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대학경쟁력 강화 때문이든 학생 수요 때문이든 개별 대학이 유망한 전공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시장논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하지만 전체 대학이 단기간에 실적을 낼 수 있는 전공이나 실용학문에만 치중하게 되면 학문 간에 불균형이 생기고 기초학문의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어서 우려스럽다. 기초학문이 무너지면 전공자도 타격을 입지만 연구의 재생산이 이뤄지지 않아 궁극적으로 실용학문마저 위기에 빠진다. 외국 대학들이 기초학문을 우선 배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선 이공계 교수들까지도 채용에서 홀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학계열 전체로는 교수채용이 적지 않았지만 정보기술(IT) 등 일부 전공에 집중된 데다 학생수 대비 신규채용은 경영학이나 법학에 비해 적다는 것이다. 3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의사 출신 벤처사업가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국가적 가치사슬의 앞부분에 있는 이공계를 기피한다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저해하는 위기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돈 되는 전공에만 골라서 투자하다간 오히려 돈을 못 만질 수도 있다는 경고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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